<청와대비서실>188.이종찬의 반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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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절대권력자인 대통령이「공천탈락」이란 정치적 사형선고를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李鍾贊.裵命國 두 사람이 여당 공천을 따냈다는사실은 정치판의 이변이 아닐 수 없다.이전까지만 해도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항명이다.
李鍾贊의원은 절대권력으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방어해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주목할만한 인물이다.
李의원은 같은 공천탈락 명단에 올랐다 그대로 탈락하고만 兩權(權翊鉉.權正達)씨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5共 핵심.그러나 그는 확고한 정치적 기반과 성공적인 이미지관리를 무기로 6共에 저항했다.
李의원은 일찌감치 자신의 탈락가능성을 감지했다.그가 가장 먼저 이상기류를 감지한 것은 3월초 공천심사위원을 구성할 때부터였다.시.도 단위별로 1명씩 심사위원을 선정했는데 李의원은 서울지역 심사위원으로 내정돼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아무런 설명없이 심사위원이 南載熙의원(現노동부장관)으로 바뀐 것이다.李의원은 이때『내가 공천의 표적이 되겠구나』라고 예감했다고 한다.아니나 다를까 그와 같이 공천심사위원으로 내정돼 있다 제외됐던 충남대표 鄭石謨의원이 공천에서 탈락된 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가 예감을 확신으로 바꾼 것은 그와 가까웠던 李贊赫.奉斗玩의원등이 별다른 이유없이 한꺼번에 공천탈락된다는 정보.그는『내손발을 자르는구나』라며 자신의 탈락을 확실히 감지했다.
李의원은 곧바로 자구노력에 들어갔다.그는 尹吉重씨등 민정당 고문들이 모인 자리에서『공천에서 탈락될 경우 주저앉지 않겠다.
반드시 무소속으로 출마한다.나는 당선된다.내 지역구인 종로는 정치1번지다.내가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면 나는 영웅이 된다』고 외쳤다.
그는 나아가『무소속으로 출마못하게 외압을 넣는다면 나는 더 좋다.종로에서는 외압을 받게되면 득표에 더 유리하다』며 공천탈락후 으레 뒤따르게 마련인 출마저지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고했다.말로만 그치지 않았다.그는 지역구내 모 호텔에서 당원및 지지자 2천여명을 동원해 단합대회 형식의 필승 결의대회까지 열었다. 李의원이 이렇게 큰소리를 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말한 그의 정치적 기반과 이미지 덕분.그는 육사출신이면서도 일찍 예편한 탓인지 군인이미지를 벗어나는데 비교적 성공하고 있었다.지역구 역시 탄탄했기에 여권내에서는 맞수가 없었다.특히 그의 지역구인 서울 종로구는「정치 1번지」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기에 단순히「의석 하나」라는 산술적 의미 이상의 비중이 있었다.
결국 李의원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공천탈락이라는 벼랑 끝에서「무소속 출마」라는 반협박성 경고로 공천을 따낼수 있었던 셈이다.
다음으로 李의원과 함께 저승길에서 돌아 나올수 있었던 裵命國의원의 경우를 살펴보자.
裵의원은 兩權.李鍾贊의원등에 비교할만한 정도는 아니지만「하나회」를 창설했던 全斗煥대통령의 심복으로 5共 출범과 함께 갑자기 정치판에 등장,건설위원장.상공위원장등 국회요직을 거친 실세중 한명이었다.특히 그가 주목받은 것은 바로 全씨 와 형님.동생하는 가까운 관계 때문.그는 정계진출 직전까지 건설업(장복건설)을 하다 건설위원장이 되었고,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여전히 주식지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경유착을 내세워 낙천으로 몰아갔다.
6共 관계자 X씨는『그가 공천을 받을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형裵命仁씨가 구명에 나섰기 때문이지요.형은 동생 소개로 盧대통령과 알게된 사이지만 오히려 동생보다 盧대통령과 더 절친했죠』라고 말했다.
그러나 裵의원 본인은 이에 대해「근거없음」을 주장했다.오히려裵의원 쪽에서는 兩權씨처럼 5共 인물이라는 이미지에「괘씸죄」가추가돼 명부에 올랐다는 것이다.그 역시 兩權씨처럼 5共초반 당시 盧泰愚올림픽조직위원장의 테니스모임 초청에 참석을 약속했다 일방적으로 파기하는등 몇차례 결례를 범했던 것은 사실이었다.裵의원은 起死回生의 이유에 대해서는『대체로 사안이 경미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한가지 짚어볼만한 중요한 문제는 가장 은밀히 이뤄진 의사결정 과정,즉「盧대통령이 崔秉烈정무수석에게 내려준 5共 핵심 5명의 공천탈락 지시 메모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것이다.
탈락과정이 가장 드라마틱했던 만큼 그 배경 역시 가장 많은 의미를 지닌 權翊鉉의원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88년3월17일 지역구인 경남산청에서 자신의 공천탈락 보도사실을 전해들은 權의원은 어리둥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盧대통령이 직접 청와대로 불러 격려까지 해주었는데 바로 사흘뒤 공천탈락 사실을 언론보도로 알아야 하는 것은 정치판의 상궤를 벗어난일이었던 것이다.權의원은 스스로 의문을 풀고자 나섰다.
공천발표 3일 뒤인 21일 월요일 청와대.權의원은 꼭 1주일만에 같은 시간,같은 장소,그러나 1백80도 달라진 처지에서 盧대통령과 다시 마주했다.
權의원은『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로부터 시작해『왜 얘기가 틀리느냐』며 따져 물었다.
곤란해진 盧대통령은『그때(3월14일 오찬)까지는 결정이 안됐었다』며 1주일전 독대가「의도적인 더블플레이」가 아니었음을 강조했다.그는 이어『모르고 있었는데 밑에서 그렇게 했더라』며 아랫사람들에게 미루는등 정확한 경위설명을 하지 않았 다고 한다.
그리고『잠깐만 기다려 달라』며 차후 별도 보상조치를 시사하기도했다.그러나 화가 풀리지 않은 權의원은『하려면 정정당당하게 하시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와버렸다.
그러면 과연 누가 대통령에게 權의원의 공천탈락을 주장했는가.
盧대통령이 權의원에게 말한「밑 사람」은 누구인가.
공천에 관계했던 Z씨는『당시 공천을 주도한 사람은 朴哲彦정책보좌관이었습니다.가족회의에서 과감한 물갈이를 주장한 사람도 朴보좌관이었죠』라고 주장했다.이는 과감한 물갈이가 일찍부터 6共핵심,특히 가족회의등에서 원칙적으로 얘기가 끝났 었다는 주장과일치한다.
한편 또다른 관계자 W씨는『朴보좌관이 공천을 좌우하고 가족회의 멤버가 權씨의 탈락을 얘기했던 것은 사실입니다.그런데 權씨를 탈락시키려는 盧대통령의 최종결심을 촉구하는데는 또다른 가족회의 멤버,즉 처남인 金復東씨의 역할도 적지않았죠 』라고 주장했다.그는 보다 구체적으로『盧대통령은 대통령취임후 처음으로 대구 선영에 성묘를 갔었죠.공천발표전 일요일이니까 3월13일이죠.그때까지 權의원 공천여부에 대해 盧대통령이 내심 망설이고 있었다고 봐야 정확할 거예요.그런데 대구 에 갔다오고 나서 대통령의 결심이 확고부동해졌죠.이때 金復東씨가 동행했습니다.金씨는당시 출마준비까지 끝내고 공천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나서지 못하자 개인적으로 불만이 많았죠.盧대통령이 그날 부친 묘에 성묘한뒤 장인(金復東씨의 아버지)묘에 성묘하러헬기로 이동할 때 金씨가 동승해「나는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면서 5共 인물인 權씨를 공천해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브레이크를 걸었다고 하더군요』라고 설명했다.
***金復東 “불공평”항의 이같은 주장은 그해 여름 청와대에서 열린 육사11기 동기모임에서 權의원이 金씨와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한바탕 심각한 말싸움을 벌였다는 얘기와 맥을 같이해 흥미롭다.물론 金의원은 이에 대해『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의 증언에 따를 경우 첫째로 盧대통령이 14일 權의원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함께 할 당시「이미 그의 공천탈락을 상당히 결심한 상태에서 공천을 줄 것처럼 격려했다」는「더블플레이」혐의가 적지않다.둘째는 盧대통령 자신의 말처럼 친 구인 權의원에게 공천을 주려고 했으나 황태자 朴哲彦을 비롯한 「밑 사람」이 최종 순간 그의 마음을 바꾸었는지도 모른다.두가지 모두 盧대통령의 성격으로 미루어 가능한 얘기다.
어쨌든 도의적으로 있어서는 안될 대통령의 더블플레이,이에 대한 항명과 번복,그 와중에 권력의 저변을 관류하는 가족회의,친.인척의 영향력행사 등은 6共 권력의 특징을 압축해 보여준다고할수 있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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