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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서 개성공단 주역으로 … 노인 폄하 곤욕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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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가 2005년 6월 17일 평양 대동관 영빈관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대화하고 있다.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정 후보는 6·15선언 5주년 통일대축전 정부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했다. 김 위원장은 정 후보에게 "젊었을 때부터 봤는데 잘 생긴 얼굴인데 (요즘) 얼굴을 계속 찡그리고 있더라.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얼굴이 좋은지 모르겠다"는 농담을 건넸다. [중앙포토]

정동영은 1990년대 TV 정치시대 개막 이후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정치인이다. 화면에 쏙 들어오는 깨끗한 외모와 특유의 정돈된 언변은 유권자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던져줬다. 기자 출신으로 민심의 흐름을 읽고 그에 대처하는 순발력도 탁월하다. 그러나 이 같은 장점은 '비주얼만 있지 콘텐트가 없다'거나 '의리를 버리고 시류만 좇는다'는 비판을 초래한 양날의 칼이기도 했다.

#1. 장남이 된 다섯째

정동영은 53년 7월 28일 전북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에서 9형제의 5남으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태어난 날 휴전협정이 체결됐기 때문에 정동영은 자신의 팔자에 '평화'가 새겨져 있다고 믿는다. 그가 다섯째이면서도 장남으로 성장한 것은 6.25의 비극 때문이다. 정동영이 태어나기도 전에 형 4명이 전란의 참화에 휩쓸려 모두 사망한 것이다. 정동영이 어릴 적 살던 순창 회문산 일대는 소설 '남부군'의 무대가 됐을 정도로 빨치산의 활동이 극심했던 곳이다.

부친 정진철(1969년 작고)은 중소 지주 집안의 장손으로 해방 직후 26세의 나이에 면장을 지냈다. 56년엔 전북 도의원에 당선됐으나 중앙정계 진출엔 실패했다. 일각에선 정진철이 일제 말기 구림면의 금융조합 서기를 지냈다는 이유로 친일 행적 의혹을 제기했다. 모친 이형옥(2005년 작고)도 임실군 청웅면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유복한 집안 출신이라 정동영은 산골 친구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성장했다. 13대 종손으로 부모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정동영은 초등학교 5년 때 전주의 친척집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전주고 2학년 때 정신적 지주이자 우상이던 아버지가 간경화로 사망하자 정동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가세도 기울었다. 실의에 빠진 정동영은 책상을 멀리하고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방황했다. 입시에서도 낙방했다. 재수 끝에 정동영은 72년 서울대 문리대 국사학과에 입학했다.

#2. 운동권 대학생

박정희 정권이 72년 10월 전격적으로 유신을 선포하면서 정동영의 대학 생활과 진로는 방향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는 반 유신의 열기로 끓어 넘쳤고 '한국사회연구회'란 이념서클에 가입했던 정동영은 자연스레 그 흐름에 합류했다.

정동영은 73년 10월 2일 최초의 유신 반대 학생시위였던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시위에 참가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돼 구류 30일을 선고받았다. 서울에서 대학을 잘 다니는 줄로만 알고 있던 고향의 모친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를 계기로 모친은 "아들을 또 잃을 순 없다"며 세 동생을 데리고 상경해 봉제 일을 하면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시작했다. 모친은 사근동 한양대 뒤편 언덕에 있는 작은 집 방 한 칸에 재봉틀 몇 대를 들여놓고 아동복 바지를 만들어 평화시장에 내다팔면서 생계를 꾸렸다. 정동영은 "직접 천과 단추를 사러 다니고 오버로크를 친 천을 둘러맨 채 청계천과 사근동 언덕길을 오가면서 서민들의 생활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정동영은 74년 4월 민청학련 가입 혐의로 또 구속됐다. 73년 겨울부터는 문리대 운동권 그룹의 세미나 모임에 참가했는데 모임의 강사였던 이철.유인태 등이 민청학련 주모자로 지목당하면서 정동영에게까지 불똥이 튄 것이다. 그는 석 달간 옥살이를 한 뒤 풀려나자마자 강제징집을 당했다.

#3. 스타 앵커

군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해 진로 문제를 고민하던 정동영은 기자 활동을 하던 고교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언론계 진출 쪽으로 목표를 정했다. 정동영은 78년 가을 '문화경향'(MBC.경향신문의 합병회사) 입사시험에 응시했다. 당시 이환의 MBC 사장이 면접 때 정동영에게 "현재의 시국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정동영은 "유신은 망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강압적 철권통치를 포기하고 민주화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어차피 회사에서 자신의 전력을 알 텐데 다른 소리를 해봐야 꼴만 우스워진다는 생각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정권 쪽에서 온건 학생운동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있다.

정동영은 83년 9시 뉴스의 단신 코너를 단독으로 진행하면서 시청자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88년 0시 뉴스의 단독 앵커로 기용됐을 때 정동영은 13대 총선(4월 26일)을 이틀 앞두고 안동에서 민정당이 돈봉투를 돌리다 적발된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정동영은 총선이 끝나자마자 자신이 0시 뉴스 앵커를 내놓고 LA특파원으로 발령나게 된 것이 돈봉투 보도로 여권에 밉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자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현장 리포트 때였다. 셔츠 차림으로 사건현장에 투입돼 현장의 참담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절망적입니다"라고 내뱉던 정동영 기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도 정치인 이미지보다 기자 이미지가 더 강했을 정도다.

#4. 권노갑을 치다

정동영은 95년 12월 지인을 통해 국민회의 측의 영입 제의를 받았다. 당시 그는 9시 뉴스 앵커를 맡아 '한국의 크롱카이트(미 CBS TV의 유명 앵커)'를 꿈꾸고 있었지만 주변 사정은 불투명했다.

정동영은 문리대 동기인 이해찬 등을 만나 조언을 구한 뒤 "정권교체에 필요한 마중물(펌프질 할 때 미리 붓는 물) 한 바가지가 되겠다"는 심정으로 정계 입문을 결심했다. 당시 김대중(DJ) 총재의 오른팔이었던 권노갑도 그의 정계 입문에 도움을 줬다. DJ는 입당 회견 때 직접 정동영을 기자실로 데리고 내려가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크게 기여할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정치인 정동영은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15대 총선에서 전주 덕진구에 출마,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됐으며 총선이 끝나자마자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정동영은 97년 대선 정국에서 김한길(당시 선거기획팀장)과 함께 DJ의 TV토론 대책을 진두지휘하면서 DJ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정동영은 전국 최다 득표를 했다. 그 여세를 몰아 8.30 최고위원 선거에 '40대 역할론'을 들고 나가 5위를 차지해 최연소 최고위원이 됐다. 이 선거 당시 정동영은 권노갑으로부터 격려금 명목으로 20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2002년 검찰 서면조사를 받았다.

2000년 12월 2일 정동영은 청와대에서 DJ 주재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의 눈엔 우리 당 권노갑 최고위원이 YS 정권 때의 김현철처럼 투영되고 있다"고 권노갑과 동교동계 구주류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 사건은 며칠 뒤 언론에 새나갔다. 동교동계 구주류는 "정동영이 누구 덕에 컸는데 언론 플레이로 뒤통수를 치냐"고 배신감을 토로했지만 결국 권노갑은 대세에 밀려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정동영의 승부수는 적중했고 그는 당내 정풍운동을 상징하는 간판이 됐다.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한 정동영은 다른 후보들이 모두 사퇴할 때 '국민경선 지킴이'를 자처하면서 노무현과 경선을 완주했고 경선 뒤 선거대책위 공동위원장을 맡아 또 한번 대선 승리의 일등 공신이 됐다.

#5. 반노(反盧)로 돌아선 정권의 황태자

2003년 11월 정동영은 두 번째 승부수를 던졌다. 민주당을 깨고 나와 의원 47명으로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뒤 초대 당의장이 된 것이다. 무모한 도전 같았지만 노 대통령 탄핵사태와 맞아떨어지면서 열린우리당은 창당 8개월 만에 152석을 얻어 국회 과반 의석의 거대 정당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총선 막판 "60~70대 이상은 투표하지 않아도 괜찮다. 집에서 쉬셔도 된다"는 노인 폄하 발언 때문에 의원직을 포기하는 좌절을 겪어야 했다.

정동영은 2004년 7월 통일부 장관으로 발탁돼 개성공단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2005년 6월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 200만㎾ 대북 송전 구상을 제안했다. 이 무렵 '(노무현) 정권의 황태자'란 소리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정동영은 지난해 5.31지방선거를 전후해 정계 진출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2월 당의장에 복귀했지만 5월 지방선거에서 박근혜가 이끄는 한나라당에 대참패를 당하면서 의장직을 내놓아야 했다. 서울 성북을 재.보선에 출마하라는 노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청와대와의 관계도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대신 정동영은 7월 독일로 떠나 두 달여 휴식을 취한 뒤 귀국해 신당을 만드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올해 4월 27일 정동영은 노 대통령을 만나 결별을 선언했다. 노 대통령은 "당을 나가도 잘 된다는 보장이 없다"며 탈당을 만류했지만 정동영은 "나도 내 방식이 있다"고 받아쳤다. 세 번째 승부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완전히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 저조한 지지율 때문에 한때 "정동영은 끝났다"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그러나 신당 경선에 뛰어든 정동영은 여론 지지도가 앞서던 손학규를 따라잡고 결국 후보 자리를 쟁취했다. 이번 승부수도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범여권 후보 단일화 등 앞으로 넘어야 할 고비는 아직 많이 남아있다. 까마득히 앞서가는 이명박과의 지지율 격차는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정동영에겐 독한 구석이 있다"고 말한다. 겉으로 약해 보여도 한번 정한 목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동영은 개성공단이 청계천을 잡을 수 있다고 믿는다.

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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