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중궁궐 밑바닥의 욕망과 질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호 12면

궁궐은 왕 이외에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곳이다. 그런데 왕자를 낳은 후궁 희빈을 보좌하던 궁녀 월령이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다. 검시를 하던 내의녀 천령(박진희)은 타살이라고 확신하지만,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한 감찰상궁은 자살로 결론을 내린다. 천령은 월령이 아이를 낳은 흔적이 있음을 확인하고 치정(癡情)에 의한 살인사건이라고 생각해 독자적으로 수사를 시작한다. 천령은 월령이 받은 연애편지를 발견하지만 괴한에게 습격당해 빼앗기고, 궁녀들의 집회인 ‘쥐부리글려’에서는 죄를 뒤집어씌워 엉뚱한 궁녀를 죽이려 한다.
월령의 죽음 뒤에는 궁궐을 뒤흔들 만한 커다란 비밀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궁중 미스터리 영화 ‘궁녀’

역사 관심이 正史에서 野史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우리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궁녀’를 보다 보면 약간의 의문이 든다.
궁궐의 내부는 어떠했는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는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영화나 TV에서 다룬 역사극들은 대체로 정사에 나오는 이야기들 위주였다.
왕위를 둘러싼 권력다툼이나 왕비와 후궁들의 암투,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들을 우리는 주로 접해왔다. 장길산이나 임꺽정 등 의적들의 이야기 역시 정사에 등장한 사건들이고 거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덧붙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배우고 본 것들은 거의 공식적인 역사책에 쓰인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역사에 대한 관심은 정사에서 야사로 흘러가고 있다. 시초는 이덕일씨의 대중적인 역사책 『조선왕 독살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익히 알고 있던 역사적 인물들의 이면에 얽힌 이야기를 흥미롭고 쉽게 풀어낸 『조선왕 독살사건』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후 『조선 선비 살해사건』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조선의 뒷골목 풍경』 등 야사에 가까운 사건들을 다루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경성기담』 『럭키 경성』 등 일제시대의 기이한 풍속을 다룬 책 역시 인기를 끌었다. TV에서는 ‘왕과 나’ ‘이산’ 등의 역사 드라마도 대거 등장했다.
또 하나의 흐름은 아예 고대사로 흘러가, 역사보다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역사물이었다.
TV 드라마인 ‘주몽’에서 촉발된 역사 판타지는 ‘대조영’ ‘연개소문’ ‘태왕사신기’로 이어졌다.

변두리 인물 부각 실패한 ‘궁녀’
다양하게 역사를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야사에 대한 관심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지나치게 정사 중심으로 과거를 바라본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에 대한 해석 역시 한정적이었고, 가장 큰 문제는 대중이 역사에 흥미를 갖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정사는 지나치게 근엄하고, 승자의 시각에서만 역사를 바라본다. 또한 승자의 이면을 바라보는 것은 더욱 더 불가능하다. 대중이 따라 배울 만한 영웅도 언제나 세종대왕·이순신·김유신 등 뻔한 인물들이었다.
관점에 따라서 역사의 변두리에 있던 인물도 과감하게 재조명하고, 기존의 영웅에 대한 재해석도 활발해질 필요가 있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에 불과한 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본보기이자 지침인 것이다.

사실 ‘궁녀’가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영화적으로 본다면 ‘궁녀’는 좀 오락가락한다. 궁궐에서 살인이 벌어지자 위에서는 그냥 덮어 버리려고 한다. 그것을 막기 위해 천령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보통의 스릴러라면 천령의 수사와 행동에 따라 사건이 밝혀지고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궁녀’에서는 천령의 행동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움직이건 말건, 자연스레 사건의 음모가 밝혀진다. 게다가 ‘궁녀’는 스릴러의 외피를 싼 초자연적인 공포물이다. 천령이 나서지 않아도, 귀신의 복수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
스릴러이건, 공포물이건 ‘궁녀’는 좀 어설프다.

궁녀 눈으로 본 궁궐의 일상
그럼에도 ‘궁녀’는 보는 재미가 있다. 그것은 역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다. 내시나 궁녀 같은 신분은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그들은 궁궐 안에 들어오면 죽을 때까지 나가지 못하고, 혹시 나가게 되더라도 절대 궁 안의 일을 말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왕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궁궐 안의 일상은, 바깥세상과 전혀 다른 풍경이다. 보통의 드라마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궁궐의 풍경을 보여줬다면, ‘궁녀’는 바로 궁녀들의 눈에 비치는 궁궐의 일상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슬쩍 훔쳐보는 왕의 방사(房事) 장면이 있고, 왕의 옷에 수를 놓는 수방에서 은밀하게 자행되는 궁녀들의 잔인한 고문이 있고, 잘못을 저지른 궁녀들을 문초하는 내명부(內命婦)와 궁녀들이 기강을 다지기 위해 행했던 집회 ‘쥐부리글려’가 있다.

게다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 전혀 낯선 공간인 궁궐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자신이 승자가 되기 위해 벌이는 갖가지 사건들이 존재한다.
‘궁녀’는 지금까지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보여주지 않았던 풍경을 재현하는 데는 성공했다.

역사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이야기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역사를 다룬 많은 책과 드라마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다루지 못한 우리 역사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다.
‘왕의 남자’ ‘궁녀’ 등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더 많은 과거의 이야기, 그것도 더 깊숙하고 주변부적인 이야기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김봉석씨는 영화ㆍ만화ㆍ애니메이션ㆍ게임ㆍ음악 등 대중문화 전반을 투시하는 전방위 평론가로 ‘B딱하게 보기’를 무기로 한 ‘봉석 코드’의 달인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