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183.공천영향력 노려 총선연기-노태우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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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盧泰愚당선자는 全斗煥이라는 태양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새로운 태양으로서 자기 몫을 찾고자했다.全斗煥이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짜여진 정치판을 盧泰愚라는 태양 중심으로 재편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치질서 재편의 핵은 자기사람심기.당연히 대권을 잡은 盧당선자는 정치판 물갈이의 결정적 계기인 국회의원선거에 주목했다.6共 출범과 함께 시작될 13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은 대통령선거 직후로 예정돼 있었다.대통령선거전 여야협 상 과정에서총선시기는「야당이 대권을 잡으면 4월,여당이 대권을 잡으면 2월」로 합의됐었다.
여당이 대권을 잡았기에 총선은 2월에 치러질 것으로 예상됐다.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全斗煥대통령은 권력승계의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벌써부터 국회의원선거의 압승에 마음이 바빴다. 대선이 끝난 이틀뒤인 87년 12월18일 全대통령은 호남지역의원들을 청와대로 불렀다.대선과정에서 호남의 金大中후보 몰표현상이 두드러짐에 따라 곧 이어질 총선에서의 고전이 예상되는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崔永喆의원이 『이런 분위기에서 전남북은 여당후보 한사람도 당선될 사람이 없습니다.각하,선거시기를 재고해주셨으면 합니다』고 말을 꺼냈다.대선의 열기,즉 호남의 황색바람이다소나마 가라앉기를 기다리기 위해 선거시기를 늦 춰주었으면 하는 호남지역의원들의 한결같은 바람을 대변한 것이다.
그러나 全대통령의 어조는 단호했다.
『여러분중 한명도 안돼도 할수 없어요.3,4월에 선거를 하게되면 개학기가 돼 전국적으로 문제가 있어요.여당이 밀리기 시작합니다.金大中이나 金泳三이나 지금 정신적으로 타격이 크므로 회복할 기회를 주면 안돼요.』 全대통령의 판단은 옳았다.비록 盧당선자가 36.7%라는 낮은 득표로 어렵게 당선됐지만 선거가 끝난 뒤의 여론은 勝者편으로 몰렸다.敗者인 兩金씨에게는 두사람의 권력욕,다시 말해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자업자득이라는 비판여론이 쏟아 지는 가운데 야당은 지리멸렬해 있었다.
全대통령만 바쁜게 아니었다.88년 벽두부터 총선분위기가 정치판을 들뜨게 하기 시작했다.선량후보들은 이미 지역에 사무실을 내고 선거준비에 여념이 없었으며,民正黨은 새해 업무개시를 공천신청접수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民正黨이 공천신청까지 다 받고서도 심사위원회를 구성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선거법 협상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다.
물론 이는 명목상의 이유에 불과하다.진짜 이유는 정치질서를 재편성하고자한 盧당선자의 의지,즉「조기총선반대」때문이었다.권력을 쥐게된 盧당선자는 당연히 눈앞에 닥친 공천권행사라는 권한을다른 어느 누구와도 나눠가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 다.
예정대로 2월에 총선을 치르자면 1월에 공천을 마쳐야한다.아무리 떠오르는 태양이라지만 총선을 치르는 현직대통령(全斗煥)의영향력을 떨쳐버릴수 없다.따라서 공천권 독점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盧당선자가 대통령에 정식취임해 명실상부한 태양이 된뒤 공천을 할수 있도록 총선날짜를 늦추는 것이었다.법적으로 총선은 4월28일 이전까지만 치르면 문제는 없었다.
당시 여권핵심관계자 Q씨의 증언.
『청와대에서는 2월9일께 총선을 치르는게 좋겠다며 구체적 날짜까지 내놓았죠.그러나 盧당선자의 태도는 모호했어요.그는 「선거날짜를 여당이 마음대로 정할수 있는 것도 아니고…」라는 식으로 말꼬리를 흐리곤했죠.』 盧당선자는 특유의 모호한 자세로 버티기작전을 구사한 것이다.아무리 당선자라고 하더라도 「全斗煥대통령에게 공천권을 나눠줄수 없다」는 내심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盧泰愚대통령만들기의 공신들 사이에서도 조기총선론이 우세했다.
상식적으로 조기총선은 압승을 의미했기 때문이다.이들은 盧당선자의 마음속에 숨겨진 공천권문제를 직접 들먹이며 설득하고자 했다. 盧당선자와 고등학교(경북고)동기동창으로 5,6共의 가교역을맡았던 金潤煥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은『공천권 지분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여당 국회의원이란 누가 공천권을 행사하든 대통령에 취임하면 모두 대통령사람이 되는 것』이라며「여권의 생리」를 앞세워 조기총선을 주장했다.
군출신으로 6共 창업공신인 安武赫안기부장 역시『공천지분때문에망설이는 것이라면 내가 全대통령에게 얘기해 공천권 90%는 당선자가 행사할수 있도록 각서까지 받아오겠다』며 노골적으로「공천권 독점 보장」을 전제하면서까지 조기총선을 강조 했다.
5共 핵심관계자 F씨는『당시 그런 얘기를 듣고 全대통령이 실제로 盧당선자의 공천권 독점행사를 보장한다고 약속해주었습니다.
그래도 못미더운지 조기총선을 안하더군요.결국 그런 의심이 5,6共의 공멸을 초래한거죠』라고 주장했다.
한편 Q씨는『창업공신들이 조기총선을 주장하면 盧당선자는 조기총선을 받아들일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그러나 얼마뒤에는다시 조기총선不可로 되돌아가는 거예요』라고 말했다.그는 이러한태도변화의 배경에 대해『盧당선자의 태도변화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朴哲彦특보라고 생각됩니다.물론 盧당선자 자신도 그때부터「어떻게 하면 全대통령의 영향권을 벗어날수 있나」만생각하는듯 하더군요.총선승리를 낙관하던 분위기였으니까 선거의 승패여부는 다음 문제였고,全대통 령의 영향을 벗어나는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죠』라고 말했다.
그러나 6共 관계자 X씨는 盧당선자측의 불안하고 불쾌했던 당시 심경을 강조했다.
『어렵게 대권을 잡은 입장에서는「이제부터 우리가 주인」이라는생각에서「우리 마음대로 할수 있다」는 생각들이었죠.다시말해「全대통령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당선자를 대권의 새 주인으로 인정하기보다 여전히 그 위에 군림하고 자했던 全대통령에 대해서는 당연히 반감이 생겼죠.공천권 몇%가 문제가 아니라 上王으로 군림할 가능성을 경계한 것입니다.』 어쨌든 盧당선자는 여야합의로 선거법 협상을 마친뒤 총선을 치르겠다는 명분을 고수하는 방법으로 총선시기를 늦추어갔다.선거법 협상대표들에게도 여야합의를 강조했다.
당시 民正黨은 한 선거구에서 1~4명을 뽑는 중선거구제를 주장하고 있었다.平民黨은 1區1人의 소선거구제를 고수했지만 民主黨은 1區1~3人의 중선거구제를 주장했다.당연히 선거법협상은 주로 民主黨을 상대로 이뤄져 중선거구제로의 합■는 거의 이뤄져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盧당선자는 내심으로 소선거구제를 생각하고 있었다.물론盧당선자는 소선거구제를 공식적으로 주장하거나 협상카드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당시 선거법협상 관계자 Z씨의 기억.1월 중순께 民正黨 蔡汶植대표와 선거법협상멤버(鄭石謨사무총장.南載熙정책위의장.李大淳원내총무등 당3역과 高建.柳興洙.金重權의원)는 盧당선자에게 그간의 협상과정을 보고하고 최종입장을 조율하기 위해 궁정동 안가로향했다.협상팀은 궁정동으로 가기전 당사에 모여『당의 입장은 1區1~4人制』라는 입장을 사전정리했다.
삼청동 당선자 사무실.盧당선자는『한사람씩 의견을 말해보라』며회의를 이끌어갔다.미리 입을 맞추어둔 협상팀 멤버들은 모두 중선거구제를 주장했다.그런데 金重權의원(6共말 청와대 정무수석 역임)이 엉뚱하게도『민주주의 명분에 걸맞은 소선 거구제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모두들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다른 의원들이『소선거구제는 어려움이 있다』며 金의원의 돌출행동을 막으려했다. 그때 盧당선자가 호통을 쳤다.
『왜들 그렇게 자신감이 없는거예요.』 동반당선보다 야당과 당당히 맞서 정치적 생명을 걸고 眞劍勝負를 벌이는 소선거구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Z씨는 그때『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모두들 더이상 중선거구제를 주장할수 없었다.Z씨는『나중에 金의원에게「왜 엉뚱한 소리를 했느냐」고 물어보니까「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말하더군요.피치못할 사정이란 盧당선자의 측근 쪽에서「盧당선자의 마음은 소선거구제」라며「소선거구제를 주장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는 거예요.결국 선거법협상은 소선거구제로 끝났지요』라고 말했다.
盧당선자는 대개 중요한 일을 이런 식으로 우회적으로,그리고 간접적으로 처리했다.
단순하게 볼때 盧당선자와 측근들이 소선거구제를 선호한 것은 당선자 자신의 말처럼「자신감」때문이었던 듯하다.떳떳하게 소선거구제로 해도 과반수안정의석을 차지할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얘기다.사실 1區1~4人制는 여당이 유리한 농촌지 역에서는 국회의원을 1명만 뽑고,불리한 도시지역에서는 3~4명을 뽑는 편법이었기에 명분이 약했다.물론 명분외의 정치적 복선을 읽을수도있다. Z씨는 盧당선자의 소선거구제 선호에 대해『명분보다「정치적 실리」가 중요한 이유』라고 주장했다.「정치적 실리」란 다름아닌「공천을 통한 물갈이 효과의 극대화」라는 것이다.기존의 1區2人制 중선거구제에서 지구당은 92개에 불과했다.비슷 한 중선거구제로 바꿀 경우 선거구가 늘지 않는다.그런데 소선거구제가되면 선거구가 훨씬 늘어난다.실제로 소선거구제하의 선거구는 2백24개로 늘어났다.새로운 사람들이 대거 정치권에 뛰어들수 있는 판이 벌어지는 것이다.물타기를 통해 자 연스럽게 물갈이의 효과를 높일수 있다.
***“기질.용기가 약해” 이런 등등의 이유로 盧당선자는 소선거구제로 마음을 굳혔음에도 자신의 주장을 직접 말하지 않았다.궁정동모임이 있은 얼마뒤 언론에서는「民正黨 중선거구제 포기」「소선거구제 임시국회에서 처리」등의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그러면서도 盧당선 자의 분명한 입장표명이 없는 가운데 막상 선거법협상은 民主黨을 상대로 1區1~3人制로 흘러갔다.盧당선자의 버티기작전 구도하에서 선거법협상은 당연히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1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2월 조기총선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다.盧당선자가 金潤煥비서실장을 통해 全대통령에게 조기총선不可를 통보한 것은 궁정동 모임이 있었던 1월20일께였다.『선거법협상이 진전되지않고 선거준비도 안돼 선거를 늦출 수 밖에 없다』는 상황론.불가피론이었지만 사실은 盧당선자가 정국주도권을잡기위해 벌인 버티기작전으로 의도된 결과였다.
全대통령은 이무렵 일해재단 이사진과의 만찬에서『내 후임자는 점잖은 분으로는 일등인데 정국을 차고나가는 기질과 용기는 약한것 같다』고 은근히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하지만 旭日昇天의 대세를 거스르기는 힘들었다.버티기만 해도 시간은 盧당선자의 편이었다. 선거구제와 선거일자를 둘러싼 盧당선자의 정국주도권 장악은 6共의 권력기반강화,다시말해 5共으로부터의 탈출을 알리는서막에 불과했다.진짜 알맹이는 공천의 내용이었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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