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이 노무현대통령과 한덕수국무총리, 문재인 비서실장 뒤를 따라 한미FTA협상유공자 격려 오찬장으로 가고있다.[중앙포토]
기획예산처에선 국가예산 전반을 조율하는 예산실이 최고 노른자위 부서다. 예산총괄과장(현 재정총괄과장), 예산실장을 거친 다음 차관·장관으로 승진하는 것이 기획예산처의 ‘출세 공식’이다. 전임 박봉흠, 김병일 장관이나 현직의 장병완 장관도 이런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변 전 실장은 그렇지 못했다. 예산실에선 심의관(94년), 사회예산심의관(99년)을 지냈을 따름이다. 차관에 오르기 전에도 그는 기획관리실장이었다. 이를 두고 기획예산처의 한 국장은 “그는 예산총괄과장-예산실장으로 이어지는 ‘황금줄’을 잡은 게 아니었다”며 “비주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주류라고 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자기 목소리가 분명했다는 평가도 있다. 노태우 정부 때 일이다. 당시 정권의 ‘황태자’로 통하던 박철언 체육부 장관이 부처 예산 증액을 요구해 왔다. 그는 “그렇게 하려면 내 목을 먼저 자르라”며 맞섰다고 한다. 예산처의 국장급 인사인 K씨는 “선심성 예산이다 싶으면 변 전 실장은 누구보다 엄중히 칼을 댔다”고 말했다.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시절 변 전 실장을 데리고 일했던 이진설 전 건설교통부 장관은 “공무원이라기보다 지사(志士)에 가까웠다”고까지 평가했다.
당시 변 장관은 중앙일보가 기획 보도한 ‘작은 정부 큰 정부’ 기사를 반박하는 간담회를 자청했다. 그는 “참여정부가 작은 정부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는 보도 내용에 대해 “국가 질서를 파괴한 위조 지폐범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다. 이 같은 ‘튀는 행동’을 두고 변 전 실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그의 부산고 동기생인 P씨는 “학교 다닐 때는 내성적이고 공부 잘하는 애 정도였는데 자기주장이 그렇게 강한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특히 변 전 실장은 국회에 다녀 온 뒤 출세 가도를 달렸다고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그는 2000년 10월 민주당 정책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파견을 나갔다. 통상 ‘당 전문위원’은 영전이 예약된 자리다. 전문위원을 거치면 ‘요직 1급’이나 차관보로 승진하는 것이 관례다. 당·정 간 윤활유 역할을 하는 데다 권력 핵심부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어서다. 고위 공무원의 ‘입법부 훈련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절 그는 자신의 ‘백락(伯樂·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 이해찬 당시 정책위원회 의장(전 국무총리·대통합민주신당 대선 예비 후보)을 일컫는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이 의장이 어떻게 봤는지 당시 변 위원을 ‘자신의 소신을 정확하게 밝히는 사람’으로 높게 평가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2002년 초 기획예산처 기획관리실장으로 복귀했다. 이듬해에는 차관에, 2005년 1월엔 기획예산처 장관에 기용된다. 이때부터 그의 승진을 두고 이해찬 전 총리가 뒤를 봐준다는 등 말이 많았다.
2005년 초 김병일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은 “몸이 안 좋아 물러나겠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사실 그는 바로 전주에 있었던 간부 연찬회에서 “앞으로 더 잘 해보자”고 고무돼 있었다고 한다. ‘자리를 내놓는 사람’이 할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기획예산처 내에서는 변양균 장관의 기용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 국무총리가 이해찬 예비후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김 전 장관은 “예산처 장관은 식견과 전문성을 두루 갖춰야 할 수 있는 자리”라며 “기획예산처 출신으로서 (변양균) 차관이 승진하는 것은 누구나 예측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 시기를 전후해 변 전 실장은 ‘자기 목소리’를 확실히 내는 사람으로도 이미지가 부각됐다. 2005년 10월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이 9조원 규모의 감세안을 발표했다. “소비 진작을 위해선 세금 부담을 줄이는 것이 대안”이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변 전 실장은 “감세 정책의 혜택은 고소득층에게만 돌아간다”며 야당 의견을 정면 반박했다. 이때부터 변 전 실장은 의도적으로 정권과 ‘코드 맞추기’에 나서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 4월 경제부처 개각설이 돌 때 한덕수 경제부총리 후임에 변 전 실장의 이름이 거론될 정도였다. 이를 두고 한 전직 경제 관료는 “한덕수는 정권과 코드를 맞추는 EQ(감성지수)보다 IQ(지능지수)를 맞추려 하고, 변양균은 IQ보다 EQ를 맞추려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변 전 실장이 추진했던 정책에 대해선 비교적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톱다운’ 예산 편성이다. 즉, 정부 부서에 예산 편성권을 대폭 이양해 운용의 자율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기획예산처 시절 정책관리실장으로 변 전 실장을 보좌한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은 “편성권을 넘긴 것은 예산맨으로선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변 전 실장은)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강행했다”고 말했다.
공기업의 ‘유리알 경영’에도 변 전 실장의 공이 크다.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제정을 통해 공기업의 경영 정보를 낱낱이 공개하도록 한 주역이 바로 그다. 한 고위 관료는 “이런 정책 추진으로 청와대의 눈에 들었다. 게다가 그는 부산 인맥의 ‘후원’도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토론 문화를 즐겼고, 공공 개혁을 밀어붙였지만 일하는 스타일은 ‘공무원다웠다’는 평이다. 변 전 실장 아래서 근무했던 한 국장급 인사는 “보고하기 까다로운 상사였다”고 말한다. 그는 “(변 전 실장이) 보고서의 내용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글씨체가 너무 굵어 눈이 아프다’고 하는 등 부하직원을 당황하게 한 적이 여러 번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문화사업 지원에 대한 소신이 분명했다고 한다. 장관 시절 그는 “프랑스에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신인작가 육성을 위해 그림도 구입하고 전시회도 지원해 준다. 우리 정부도 적극 나서야 한다”며 “그래야 ‘제2의 이중섭’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림에 심취한 덕분일까. 그의 사생활에선 꽤 서정적인 모습이 많이 발견된다. 그와 가까운 한 언론계 인사는 “변 전 실장은 민주당 전문위원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것을 자랑했다”며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절 구경을 가고 그림을 그리던 낭만파 공무원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면모는 이번에 파장이 커진 그의 e-메일 아이디에서도 드러난다. 신정아씨의 아이디가 ‘신다르크(shindarc:신정아+잔다르크의 합성어)’로 다소 공격적이라면, 변 전 실장은 ‘아트비스(artbis)’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에 대해 “artbis는 ‘언제나 웃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Always Ready To Break Into a Smile)’의 약자”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변 전 실장은 최근 한 지인과 전화 통화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 행동이 이렇게 일파만파로 커질 줄 몰랐다”며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인 것 같다”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한 측근은 “(변 전 실장이) 이번 일로 심한 충격을 받았다. 혹시 ‘나쁜 생각’을 가질 수 있어 지인 2~3명이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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