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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이 말하는 변양균(前 청와대 정책실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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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이 노무현대통령과 한덕수국무총리, 문재인 비서실장 뒤를 따라 한미FTA협상유공자 격려 오찬장으로 가고있다.[중앙포토]

신정아씨 사건으로 검찰 소환까지 앞둔 변양균(58·사진) 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은 원래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게 주변의 평이다. 고교·대학 때는 물론 행정고시 14회로 기획예산처(옛 경제기획원)에 근무할 때까지도 그랬다. 공무원으로서 성장한 과정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기획예산처에선 국가예산 전반을 조율하는 예산실이 최고 노른자위 부서다. 예산총괄과장(현 재정총괄과장), 예산실장을 거친 다음 차관·장관으로 승진하는 것이 기획예산처의 ‘출세 공식’이다. 전임 박봉흠, 김병일 장관이나 현직의 장병완 장관도 이런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변 전 실장은 그렇지 못했다. 예산실에선 심의관(94년), 사회예산심의관(99년)을 지냈을 따름이다. 차관에 오르기 전에도 그는 기획관리실장이었다. 이를 두고 기획예산처의 한 국장은 “그는 예산총괄과장-예산실장으로 이어지는 ‘황금줄’을 잡은 게 아니었다”며 “비주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주류라고 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자기 목소리가 분명했다는 평가도 있다. 노태우 정부 때 일이다. 당시 정권의 ‘황태자’로 통하던 박철언 체육부 장관이 부처 예산 증액을 요구해 왔다. 그는 “그렇게 하려면 내 목을 먼저 자르라”며 맞섰다고 한다. 예산처의 국장급 인사인 K씨는 “선심성 예산이다 싶으면 변 전 실장은 누구보다 엄중히 칼을 댔다”고 말했다.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시절 변 전 실장을 데리고 일했던 이진설 전 건설교통부 장관은 “공무원이라기보다 지사(志士)에 가까웠다”고까지 평가했다.

주변 인사들은 그에 대해 한결같이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품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지난해 4월 5일 기획예산처 장관 때 그는 긴급히 출입기자들을 불러 놓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있었다. “국가 기본질서에 관한 것이다. 위조지폐 등 국가 질서에 대한 것은 엄하게 다스리지 않느냐.”

당시 변 장관은 중앙일보가 기획 보도한 ‘작은 정부 큰 정부’ 기사를 반박하는 간담회를 자청했다. 그는 “참여정부가 작은 정부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는 보도 내용에 대해 “국가 질서를 파괴한 위조 지폐범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다. 이 같은 ‘튀는 행동’을 두고 변 전 실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그의 부산고 동기생인 P씨는 “학교 다닐 때는 내성적이고 공부 잘하는 애 정도였는데 자기주장이 그렇게 강한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특히 변 전 실장은 국회에 다녀 온 뒤 출세 가도를 달렸다고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그는 2000년 10월 민주당 정책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파견을 나갔다. 통상 ‘당 전문위원’은 영전이 예약된 자리다. 전문위원을 거치면 ‘요직 1급’이나 차관보로 승진하는 것이 관례다. 당·정 간 윤활유 역할을 하는 데다 권력 핵심부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어서다. 고위 공무원의 ‘입법부 훈련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절 그는 자신의 ‘백락(伯樂·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 이해찬 당시 정책위원회 의장(전 국무총리·대통합민주신당 대선 예비 후보)을 일컫는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이 의장이 어떻게 봤는지 당시 변 위원을 ‘자신의 소신을 정확하게 밝히는 사람’으로 높게 평가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2002년 초 기획예산처 기획관리실장으로 복귀했다. 이듬해에는 차관에, 2005년 1월엔 기획예산처 장관에 기용된다. 이때부터 그의 승진을 두고 이해찬 전 총리가 뒤를 봐준다는 등 말이 많았다.

2005년 초 김병일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은 “몸이 안 좋아 물러나겠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사실 그는 바로 전주에 있었던 간부 연찬회에서 “앞으로 더 잘 해보자”고 고무돼 있었다고 한다. ‘자리를 내놓는 사람’이 할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기획예산처 내에서는 변양균 장관의 기용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 국무총리가 이해찬 예비후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김 전 장관은 “예산처 장관은 식견과 전문성을 두루 갖춰야 할 수 있는 자리”라며 “기획예산처 출신으로서 (변양균) 차관이 승진하는 것은 누구나 예측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 시기를 전후해 변 전 실장은 ‘자기 목소리’를 확실히 내는 사람으로도 이미지가 부각됐다. 2005년 10월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이 9조원 규모의 감세안을 발표했다. “소비 진작을 위해선 세금 부담을 줄이는 것이 대안”이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변 전 실장은 “감세 정책의 혜택은 고소득층에게만 돌아간다”며 야당 의견을 정면 반박했다. 이때부터 변 전 실장은 의도적으로 정권과 ‘코드 맞추기’에 나서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 4월 경제부처 개각설이 돌 때 한덕수 경제부총리 후임에 변 전 실장의 이름이 거론될 정도였다. 이를 두고 한 전직 경제 관료는 “한덕수는 정권과 코드를 맞추는 EQ(감성지수)보다 IQ(지능지수)를 맞추려 하고, 변양균은 IQ보다 EQ를 맞추려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변 전 실장이 추진했던 정책에 대해선 비교적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톱다운’ 예산 편성이다. 즉, 정부 부서에 예산 편성권을 대폭 이양해 운용의 자율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기획예산처 시절 정책관리실장으로 변 전 실장을 보좌한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은 “편성권을 넘긴 것은 예산맨으로선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변 전 실장은)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강행했다”고 말했다.

공기업의 ‘유리알 경영’에도 변 전 실장의 공이 크다.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제정을 통해 공기업의 경영 정보를 낱낱이 공개하도록 한 주역이 바로 그다. 한 고위 관료는 “이런 정책 추진으로 청와대의 눈에 들었다. 게다가 그는 부산 인맥의 ‘후원’도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토론 문화를 즐겼고, 공공 개혁을 밀어붙였지만 일하는 스타일은 ‘공무원다웠다’는 평이다. 변 전 실장 아래서 근무했던 한 국장급 인사는 “보고하기 까다로운 상사였다”고 말한다. 그는 “(변 전 실장이) 보고서의 내용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글씨체가 너무 굵어 눈이 아프다’고 하는 등 부하직원을 당황하게 한 적이 여러 번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문화사업 지원에 대한 소신이 분명했다고 한다. 장관 시절 그는 “프랑스에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신인작가 육성을 위해 그림도 구입하고 전시회도 지원해 준다. 우리 정부도 적극 나서야 한다”며 “그래야 ‘제2의 이중섭’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림에 심취한 덕분일까. 그의 사생활에선 꽤 서정적인 모습이 많이 발견된다. 그와 가까운 한 언론계 인사는 “변 전 실장은 민주당 전문위원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것을 자랑했다”며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절 구경을 가고 그림을 그리던 낭만파 공무원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면모는 이번에 파장이 커진 그의 e-메일 아이디에서도 드러난다. 신정아씨의 아이디가 ‘신다르크(shindarc:신정아+잔다르크의 합성어)’로 다소 공격적이라면, 변 전 실장은 ‘아트비스(artbis)’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에 대해 “artbis는 ‘언제나 웃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Always Ready To Break Into a Smile)’의 약자”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변 전 실장은 최근 한 지인과 전화 통화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 행동이 이렇게 일파만파로 커질 줄 몰랐다”며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인 것 같다”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한 측근은 “(변 전 실장이) 이번 일로 심한 충격을 받았다. 혹시 ‘나쁜 생각’을 가질 수 있어 지인 2~3명이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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