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환 사건 계기로 본 야유의 사회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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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야유(揶揄)=남을 빈정거려 놀림’.

자꾸 놀리면 더 이상 못 참아. 자신에게 욕한 관중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리는 에릭 칸토나(上)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관중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르는 론 아테스트. [중앙포토]

최근 프로축구 선수 안정환(수원 삼성)이 경기 도중 관중석으로 넘어가 야유하는 관중에게 항의한 사건(본지 9월 12일자 26면)을 계기로 관중의 야유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하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시끄럽게 떠들며 야유를 퍼붓는 관중을 헤클러(heckler)로 부르며 스포츠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본다. 야유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에선 인종차별성 발언 등으로 선수들이 참기 힘든 야유도 많다.

 한국에서는 예의를 중시하는 정서상 야유에 대해 민감한 편이다. 특히 선수 가족 등 사생활을 거론하는 야유는 삼가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안정환 사건에 대해 최근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조사한 결과 ‘심한 모욕감을 준 관중이 더 문제’라는 의견이 46.9%였고, ‘안정환의 잘못이 더 크다’는 의견이 35.0%로 더 낮게 나타났다.

 ◆“나를 향한 야유는 다 들린다”=경기에 집중하는 선수들에게 야유가 들리긴 할까. ‘웅웅’거리는 소음 정도일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선수들 대부분 “잘 들린다”고 답했다. 프로야구 현대의 베테랑 전준호(38)는 “아무리 큰 경기에서 몰입한다 해도 나에 대한 야유는 귀에 쏙쏙 들어온다”고 말했다.

 ◆"가족에 대한 야유는 못 참아”=프로야구 롯데의 정수근(30)은 “실수에 대한 야유는 팬의 권리로 이해한다”면서도 “가족이나 부모 욕을 할 땐 참기 어렵다”고 말했다. 프로축구 FC 서울의 유망주 김현승(18)은 6월 21일 수원과의 원정경기에서 아버지까지 욕을 먹자 그 충격으로 한 달간 슬럼프를 겪었다. 김현승은 “경기를 마치고 나가는데 수원 팬들이 나에게 욕을 했고, 항의하는 아버지한테도 욕을 퍼부었다”며 “무슨 잘못을 했기에 아버지까지 욕을 먹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안정환의 경우도 자신에 대한 야유는 참았으나 아내까지 거론하자 관중석으로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모욕적인 표현은 제재해야”=명예훼손이나 다름없는 야유를 한 관중은 제재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 경기장 규칙을 만들어 문제 발언을 한 관중을 퇴장시키는 방안을 준비하는 구단도 있다. 야유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외국에서도 인종차별에 대해선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지난해 3월 월드컵에서 관중이 인종차별의 언행을 하면 해당 팀의 승점 3점을 삭감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세 번 발생하면 해당 국가의 경기 참가를 금지시킨다.

 ◆야유도 홈 어드밴티지=야유에 흥분하게 되면 선수는 플레이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결국 자기 손해다. 그래서 한화의 강석천 코치는 “야유도 일종의 심리전이므로 경기의 일부로 즐기라”고 충고한다. 프로축구 FC 서울의 셰놀 귀네슈 감독은 “야유가 귀에 들어온다면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경기에 더 집중할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팬들은 야유를 홈 어드밴티지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야유는 대부분 원정 팀에 집중된다. 따라서 홈 팬들을 야구에서는 ‘10번 타자’, 축구에서는 ‘12번째 선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야유는 상대 팀의 힘을 빼고, 홈팀의 사기를 올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홈팀 선수들이 들어도 심하다고 느끼는 욕설과 야유는 역작용을 할 때도 있다. 정수근은 “부산 팬들이 열성 면에서는 제일”이라면서도 “상대 특정 선수만 계속해 놀리는 경우 내가 봐도 불쌍할 정도”라고 말했다.

 ◆온라인이 더 심해=프로야구 두산의 이왕돈 대리는 “일부 안티 팬들이 홈페이지나 포털사이트에 특정인을 지목해 ‘바보’니 ‘멍청이’니 하는 것부터 원색적인 욕까지 한다. 이를 무차별적으로 외부로 퍼나르고 여기에 악성 댓글이 달리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요즘은 선수들이 모두 인터넷을 이용하기 때문에 경기장 야유보다 더 심하게 느낄 수 있다.

 ◆“야유는 군중 속에서 표출되는 공격성”=한국체대 장덕선(스포츠심리학) 교수는 “야유는 일종의 시기심이나 공격성의 대리 표출”이라며 “선수라면 평소 훈련에서 온갖 상황을 가정해 자기 통제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관중의 야유에 쉽게 흥분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선수라면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극복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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