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신작 ‘즐거운 인생’ 의 영화감독 이준익 흥행 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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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는 대로 놀고, 노는 대로 생긴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 세속의 말을 이준익(48) 감독과 그의 영화에 옮겨보고 싶다. 그는 생긴 것처럼 영화를 만들고, 자신의 영화처럼 생겼다. 푹 눌러쓴 모자에 장난기 가득한 눈매, 정겨운 욕설과 반말을 섞어 쓰는 그는 천상 예술가라기보다 격의 없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 또한 어려울 것 없고, 지나친 자의식으로 고통스러울 것 없 는 대중영화다. 물론 그 속에는 인생의 정수를 건드리는 한 방이 숨어 있다. 인생의 쓴맛과 신맛을 아는 이라면 더욱 코 끝 찡해질 한 방이다.

 이준익은 그 자신이 영화계 마이너 리그의 대표주자다. 한때 극장 간판을 그리며 생계를 이었고 영화광고·외화수입·제작을 거쳐 감독이 됐다. 영화를 전공한 적도 없고, 조감독을 거치지도 않은 특이한 이력이다. 1993년 아동영화 ‘키드캅’으로 데뷔한 후 10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영화 ‘황산벌’은 충무로에 아주 예외적인 감독의 등장을 알렸다. 1200만 신화를 일군 ‘왕의 남자’, 퇴물 스타가수의 부활을 다룬 ‘라디오 스타’, 신작 ‘즐거운 인생’까지 그는 ‘스타가 없고, 적은 제작비에, 영화적 밀도보다 관객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이준익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의 한결 같은 주제는 마이너리티에 대한 지지와 애정. 그에게 휴머니스트 감독이라는 수식은 너무도 잘 어울린다. 다음달 13일 개봉하는 ‘즐거운 인생’도 그 연장선에 있다.

# 마이너리티 예찬=이준익의 영화는 권력 혹은 시스템에 의해 핍박 받는, 마이너리티·아웃사이더·서민들의 이야기다. ‘황산벌’은 황산벌 전투에 참가한 민초, ‘왕의 남자’는 조선조 궁궐에 들어간 광대가 주인공이다. ‘라디오 스타’는 한물간 가수와 매니저, ‘즐거운 인생’은 40대 고개 숙인 가장들을 내세웠다. 얼핏 패배자처럼 보이는 이들이 진짜 세상의 중심이라고 복원시키는 것이 그의 영화다.

 충무로에 거의 사라졌던 사극 장르를 부활시킨 ‘황산벌’과 ‘왕의 남자’에서는 ‘정사(正史)’를 뒤집고, 광대가 왕과 ‘맞짱’ 뜨는 발칙한 민중성도 선보였다.

 감독의 비주류에 대한 애정은, 초년병 시절 사회적 장벽 앞에 좌절했던 개인사와도 맞물린다(세종대 회화과를 중퇴한 그는 한때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경비로 일하며 시사만평을 그렸다. 합동영화사 도안사(디자이너)로 영화에 입문했고, 93년 영화사 씨네월드를 차려 ‘아나키스트’ ‘간첩 리철진’ ‘달마야 놀자’ 등을 제작했다). 다른 한편 실제 주류와 비주류가 전복되는 2000년대 한국 사회의 경험과 맞물려 더욱 큰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 배역의 민주주의=이준익 영화에는 원 톱이 없다. 유일한 투 톱 영화였던 ’라디오 스타’에도 인디 밴드 노브레인 등 작은 배역들까지 존재감을 발휘했다. 세 명 이상 집단 주인공이 앙상블 연기를 선보이고, 주·조·단역이 공평한 생명력을 갖는다. 비주류에 대한 애정, 공동체주의에 대한 감독의 열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배우들 역시 스타 이미지보다는 인간미가 돋보이는 배우들을 선호한다. 제작 현장에서도 배우·스태프에게 상처주거나 착취하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극중 악역이 없는 것도 특징. 단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이해력은, 남성 감독 일반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 예술보다 소통=그의 영화는 기술적 화려함이나 영상 미학보다 진정성에 호소한다. 때로 투박하고 거친 연출로 미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이에 대해 그는 ”연출의 창의성보다 관객과의 소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제작자 출신으로, 작가적 자의식보다 경제적 효율성을 중시하는 그는 정해진 예산 안에서 1년에 한 편씩, 꼬박꼬박 기일을 맞추는 생산성으로도 유명하다. 영화적 밀도는 떨어지더라도, 관객과 공명하는 이야기를 큰 멋 부리지 않고 즉각 제조해내는 소박한 세공술은 스타일 과잉과 메시지 빈곤에 사로잡힌 충무로가 본받을 미덕으로 꼽힌다. 이 감독은 벌써 차기작 ‘님은 먼 곳에’ 제작에 들어갔다. 수애 주연에, 10월 크랭크인 한다.

 
 # 놀이정신 & 광대 이준익=그의 영화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놀이’다. ‘황산벌’에서는 전투를 마치 놀이처럼 재현하고 ‘거시기’로 대표되는 언어 유희를 통해 기존 역사를 해체했다. ‘왕의 남자’에서는 아예 광대의 세계로 들어갔다. 여기서 왕과 광대는 놀이를 통해 진실에 직면한다.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은 대중음악이라는 놀이가 주제다. ‘라디오 스타’에서 감독은 인디밴드 노브레인의 천진성을 찬미했다.

 ‘즐거운 인생’에 대해서는 “악기를 들고 무대에 서면 누구나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놀이정신이 곧 살아가는 힘이라는 뜻이다. ‘왕의 남자’ 속 광대들의 세계는 ‘영화광대’라는 감독의 자기 정체성의 표현으로 읽히기도 한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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