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총선 때문에 불법 송금도 사면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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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대중 정부하에서 발생한 4억5천만달러 대북 비밀송금 관련자에 대해 특별사면이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법질서를 무너뜨리는 무책임한 태도며, 대통령의 사면권을 남용한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부적절하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특검까지 도입해 진상을 규명해야 했던 사건을 갑자기 '없던 일'로 돌리겠다니 법치주의를 몽땅 무너뜨릴 작정인가.

대북송금 관련 기소자는 6명으로,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 4명은 현재 대법원 상고심에 계류돼 있는데 무엇이 급해 벌써부터 사면설을 흘리는가. 대통령의 사면권은 극히 예외적으로 적용돼야 마땅하다. 더구나 재판에서 어떤 판결이 나오든 대통령이 특사하겠다면, 헛수고에 불과한 그런 재판을 할 이유가 뭔가. 1, 2심 재판부는 "남북 정상회담 자체를 고도의 정치적 성격을 띤 통치행위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실정법을 어긴 송금행위까지 통치행위로 볼 수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도 노무현 대통령이 재판이 끝나자마자 특별사면을 하겠다는 것은 대북송금을 통치행위로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현 정권이 사법부와 실정법을 우습게 보지 않고는 이럴 수 없다.

사면 검토 배경도 납득하기 어렵다. 청와대에선 盧대통령이 특검을 수용한 이유를 "향후 대북지원이 합법적이고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려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형이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면을 검토하니 대북지원에서 합법성과 투명성을 무시하겠다는 뜻인가. 앞으로 유사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처벌하거나 막을 방법도 없게 됐다. 혹시 현 정권도 통치행위란 구실로 불투명한 대북지원을 하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이 문제로 지금 구속된 사람은 박지원씨뿐이고 나머지는 집행유예 내지 벌금형을 선고받았을 뿐이다. 이런데도 사면설이 나오는 것은 결국 DJ를 의식해 호남 민심을 잡자는 총선 전략이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투명치 못한 지난 정부의 대북정책 때문에 얼마나 많은 혼선이 야기됐는가. 이제 총선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덮자고 해선 말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