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치기」 반성 못하는 민자당/오병상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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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날치기이후 민자당은 더욱 꼴사나워졌다. 이른바 날치기 실패 책임론을 둘러싼 내부적 압력과 분열상 때문이다.
한 고위당직자는 날치기를 거부한 이만섭 국회의장을 「배은망덕한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자기를 전국구 의원으로 금배지 달아주고 3부 수장의 하나인 국회의장까지 시켜준 사람이 누군데…』라며 이 의장을 몰아붙였다.
민주계인 한 의원은 『우리는 몸싸움하느라 옷이 찢어지는데 민정·공화계 의원들은 남의 입처럼 손놓고 구경만 하더라』며 다른 계파 의원들을 「의붓자식」이라고 힐난했다.
반면 민정계 의원들은 『사진에 찍힌 행동대원을 봐라. 다 민정계 아니냐. 민주계가 오히려 손놓고 있더라』며 핏줄따지는 충성심 시비에 반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더 한심스런 모습은 3일 오후에도 총무단의 동원령에 따라 본회의장에 나왔다가 회의가 이뤄지지 않자 의사당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일부 의원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고,왜 자신들이 날치기 행동대원이 되어 여론의 질타를 받아야 하는지 의아해했다. 단지 「대통령의 뜻」이라는 당직자들의 설명 하나에 이리저리 몰려다니기만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후유증과 여론의 비난을 감수하고 강행했던 날치기가 소속의원들조차 의아해할 정도로 설득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일단 여당이 날치기 불가피성의 논리로 제시했던 「법대로」가 과연 충분한 명분이었던가부터 의문이다. 법에 따라 새해가 시작되기 한달전(12월2일)까지 예산안을 처리해야 하지만 동시에 법은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준예산을 편성해 경상비를 지출할 수 있게 여유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 강경·돌파가 아니라 대화·타협이기에 이같은 여유를 둔게 아닌가. 또 날치기 통과에 따른 국민적 실망감 등 수치화될 수 없는 정치적 후유증을 민자당은 전혀 고려히자 않았다는 점이다.
정국을 주도하는 여당이 날치기에 앞서 협상에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는가도 의문이다. 야당이 고리로 걸고 있던 안기부법 개정안과 관련해 민자당은 3역회담이나 총무회담이라는 공식창구를 통해 양보안을 내놓는데 인색해 김병오 민주당 정책위 의장이 화를 내며 회담장을 뛰쳐나오게 하는 등 야당을 자극한 일면이 있었다. 오히려 비공식창구인 청와대 비서실장이 야당의 정치특위 간사와 만나 보다 진전된 양보안을 내놓았지만,이미 농림수산위원회에서 날치기로 추곡가 문제가 처리된 뒤였기에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었다.
자세한 사정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문민정부와 날치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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