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산다>4.서울대職 내놓고 낙향 호서대 황희륭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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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온국민의 소망인양 돼있는 우리나라에서 서울대 교수직을 버리는 일은 그 자리에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일. 그러나 미련없이 이 자리를 박차고 지난 가을이후 충남아산군배방면수철리 배봉산 허리춤에 들어가「아이구 좋아,아이구 좋네」를 연발하며 산다는 黃熙隆교수(59.현재 湖西大 전자공학과교수).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정이 도피적이거나 자연을 혼자 즐기기위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한다.
뜻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일터 가까운 곳에 마침 삼라만상에 대한 욕심이 덧없음을 가르치는 자연이 있어 그속에 사니 축복이라 여긴다고 했다.
자신의 새일터인 湖西大 아산캠퍼스에서 20분거리.다시 호수같은 저수지를 끼고 겨울裸木이 허허로운 배봉산 고개길을 10분정도 올랐을 때 마른 들풀에 둘러싸인 그의 농가는 전혀 치장하지않은 촌부의 얼굴로 나타났다.
때마침 불어오는 차고 맑은 바람은 정신이 맑아지도록 칼칼했다. 우리나라 전자공학계의 중진인 그가 湖西大로 옮겨간 것은「이름」에 연연하지 않고 더 늙기전에 보다 사회에 기여할 일을 찾기 위해서.
『서울보다 사정이 갖가지로 열악한 지방대학에서 학생들의 실력향상에 힘을 쏟는 일도 매우 의미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일본에잠시 체류할 때 동경대교수들이 지방대학의 발전을 위해 정년을 몇년 앞두고 자리를 옮기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 았었지요.』 혹 최첨단 학문분야에서 새로 밀려드는 쟁쟁한 실력의 젊은 교수들에게 위협을 느낀 탓은 아니냐는 짓궂은 질문에 그는『그건 절대 아니오.설사 그렇다해도 얼마든지 정년까지 명예를 지키며 버틸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대학풍토 아닙니까』라며 잠시 목소리를높였다. 서울대및 대학원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고 지난해로 30년째 서울대 컴퓨터공학과교수로 근속해 왔으면서도 시골에서 갓 올라온듯 텁텁한 말투와 용모를 갖고 있는 그는『앞으로 10년이내에 내가 맡은 학과를 한국에서 손꼽히는 학과로 만들 예 정』이라는 의욕에 부풀어 있다.
창고처럼 수수한 교수실에서 열기에 찬 학과육성계획.학생지도 방안등을 전해 들으면서 그의 轉職이유에 믿음이 얹혀졌다.
그가 하필 湖西大로 내려오게 된 것은 예부터 알고 지낸 이 대학 姜錫圭총장이 그에게 교수추천을 의뢰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러나 가겠노라던 그의 제자들이 지방대학이라 기피하자 결국 약속을 깨버린 격이 됐다.
미안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는 아예 자신이 직접 가 교육열이 대단한 총장을 돕고 일생동안 쌓아온 학문의 결정을 지방의 후학들과 나누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아내(윤임자.54)와 아이들(3남.28,26,25)의 반대는대단했다.
『더구나 지방 사립대는 텃세가 심하다』며 만류하던 동료교수들이 아이디어를 낸 것이 교환교수로 92년3월부터 1년간 가서 맛을 보고 결정하라는 것.
관악산을 오를 때마다 매연에 질식할 듯한 도시를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고 신림동 학교에서 예전 서울대공대가 있었던 공릉동 집까지 출퇴근하면서 늘 교통혼잡에 시달렸던 그에게 시골내음이 풍기는 캠퍼스,반들거리지 않는 학생들과의 만 남은 곧 그를 이곳에 붙들어매기에 충분했다.
그는 아내를 설득해 올 3월부터는 이곳의 전임으로 아예 자리를 옮겨앉았다.남편의 강경한 자세에 아내도 30년간 몸담았던 교직(국민학교)을 그만두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천안시내에 아파트를 얻었던 그는 곧 퇴직금등으로 해발 6백m배봉산중턱에 평당 10만원씩 주고 1천여평의 땅을 샀다.
아직 튼튼해 보이는 농가의 골조는 그대로 살리고 냄새나는 화장실,손길이 많이 가는 난방시설등은 아내가 편하게 개조한 후 아예 이사했다.집을 둘러싸고 있는 마당에는 이미 깨와 고구마.
감자.배추등을 수확,농사짓는 재미를 보았고 내년의 본격적인 농사를 위해 얼마전에는 대대적인 객토작업을 벌였다.
『앞으로 湖西大 黃교수에게는 자식을 믿고 맡길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 그는 가끔 수십년간 사귀어온 서울대의 교수와교직원.수위들이 왈칵 그리워질 때도 있으나『이제 서울대 黃교수는 갔고 새로운 삶의 도전과 기쁨에 들떠 가끔은 잠을 못이루는湖西大 黃교수가 있을 뿐』이라 했다.이곳에 오면서 돼지를 잡아50여가구의 동네잔치를 열기도 했다는 그는『안개같이 왔다가는 인간들을 묵묵히 지켜 봐온 바위와 나무들을 아침.저녁으로 대하면서 풀 한포기에도 외경심이 생긴 다』고 했다.
〈高惠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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