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첨단서비스(선진국 무엇이 다른가: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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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같은 정보통신망/가입자 6백만… 24시간 운용
파리 시내를 걷다보면 여기저기 짤막한 문구와 함께 전화번호가 적힌 커다란 광고가 자주 눈에 띈다. 「당신의 신문을 펴십시오 3615」 「3614,물건을 가장 쉽게 구입하는 방법」….
알쏭달쏭한 이 광고들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정보통신 서비스 미니텔(MINITEL)의 서비스 안내다. 날씨나 열차시각 같은 기초적인 정보는 물론 뉴스·운세·쇼핑,심지어 세금안내·음식점 예약·어린이 과외·섹스산업에 이르기까지 2만여종의 정보서비스가 전화선에 연결된 단말기를 통해 제공되고 있다. 말이 2만여종이지 사실상 일상생활에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정보를 24시간 손쉽게 검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취재팀이 방문한 프랑스 가정에도 예의 아담한 「요술상자」 미니텔 단말기가 갖춰져 있었다. 주인의 도움을 받아 키를 두드리니 백과사전처럼 상세한 색인표가 기가 질릴 정도다. 『현재 6백여만대의 미니텔이 전국에 보급돼 이젠 전화기 정도로 여겨진다』는 것이 미니텔을 운영하고 있는 국영회사 프랑스 텔레콤의 연구원 리나르드씨의 설명이다. 놀랍게도 이 시스팀이 프랑스에서 개발된 것은 근 15년전인 70년대 후반.
우리는 흑백 TV 시대에 살고 있을 때 이곳에선 정보화사회의 기초가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미니텔이 프랑스 정보통신의 핵심이자 전부라고 보면 큰 잘못이다.
프랑스의 앞서간 정보통신분야는 미니텔이 아니라 산업·기술부문을 잇는 첨단통신망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세번째로 크다는 과학도시 톨루즈.
남불 특유의 아름다운 풍광과 포도밭·밀밭으로 둘러싸여 언뜻 보기엔 과학도시라기보다 목가적인 느낌이 드는 도시다.
그러나 이 도시 바닥에는 놀랍게도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앞선 수준의 종합 정보통신망 ISDN(Integrated Servics Digital Network)이 거미줄처럼 깔려 있다. ISDN은 음성·전자·화상 등 각종 정보를 한데 묶어 하나의 회선을 동시에 전송하는 첨단 통신기술.
연구소들을 잇는 전용통신망 REMIP(Research Midi­Pyrenees),기업들을 연결하는 OCTARES 등 첨단 ISDN이 툴루즈의 22개 주요 연구소와 5개 거대기업을 신경망처럼 구석구석 연결시키고 있다. 게다가 REMIP·OCTARES는 프랑스 전역의 4백개 연구기관에서 1만5천여명이 동시에 같은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전국적인 통신망 RENATER에 연결돼 툴루즈에 앉아 프랑스내 모든 중요 연구소의 자료를 검색할 수도 있다.
◎“정보통신,물류보다 중요하다”/미·불·일등 앞다퉈 야심찬 투자계획
툴루즈 개발사무소 패트릭 토네씨는 『이밖에 대학·상공회의소,심지어 호탤내에서도 세계 25개국 1백여개 도시와 인공위성을 통한 화상회의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정보화시대를 앞서가려는 노력은 비단 프랑스에 그치지 않는다.
중개무역으로 먹고사는 것 쯤으로 알려진 싱가포르가 정보통신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다투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싱가포르는 21세기를 겨냥,모든 사회활동의 고부가가치화를 위해 이미 온나라를 「지능도시국가」(Intelligent City State)로 개조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91년부터 광케이블 통신망인 Digi Net를 구축,기업들에 전용회선을 임대해 주고 있으며 사진처럼 선명한 화상이 전송되는 비디오텍스 시스팀 TELEVIEW를 깔아 1만여명 이상이 이용중이다.
이 정도만 해도 아직 ISDN의 시험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로선 까마득한 수준이지만 미국·일본 등은 기존 ISDN보다 처리속도가 2천배 빠른 광대역 종합정보통신망(BISND:Broad Band ISDN)을 나라 전체에 구축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BISDN은 모든 정보를 빛으로 변환,광섬유를 통해 전송시켜 하나의 회선으로 음성·화상·문자 등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대량으로 처리하는 기술.
웬만한 기업내에서 근거리통신망인 LAN이 이미 완벽히 갖춰진 미국은 모든 통신망을 충분히 연결해 줄 수 있는 용량의 정보통신망이 필요한 단계에 와있어 「정보의 고속도로」격인 소위 일렉트릭 하이웨이(Electric Highway)를 2015년까지 건설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모든 음성·화상·문자정보를 일괄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광케이블을 전화선처럼 놓겠다는 것으로,한마디로 정보의 고속도로를 각 가정의 안방까지 닦겠다는 것이다.
일본 역시 뒤질세라 BISDN을 「신사회자본」의 주요 개념으로 파악,미국처럼 2015년까지 매년 우리 총예산 38조5백억원의 40%를 넘는 2조엔(한화 16조원)을 통신분야에만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취재팀이 방문한 독일 뮌헨의 지멘스 통신연구소에서도 이미 BISDN의 핵심기술인 ATM개발을 완료한 상태였다.
광신호를 이용,각종 정보를 묶어 수백㎞ 떨어진 여러 지역에 한꺼번에 전송할 수 있는 첨단기술이다.
3차원 화면을 통해 모든 영상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 이상」으로 상세히 화면으로 전달,예컨대 뮌헨의 환자를 베를린·함부르크 의사들이 환부를 직접 보면서 진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한국 역시 이러한 통신망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이 연구소 홍보담당자 펠러씨는 장담한다.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넘어가면서 모든 선진국에서는 도로·철도·항만시설이 아닌 정보통신망이 사회간접자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정보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한 상품으로 자리잡아 가면서 정보의 원활한 유통을 보장케하는 정보통신망이 제일 중요한 사회간접 자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취재팀은 국가의 운명이 효율적인 통신망 구축에 좌우됨을 절감하고 정보화 사회의 기초를 닦고 있는 현장을 가는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가 투자에 인색,도로·항만같은 구식 사회간접자본에 병목현상을 빚고있는 사이에….
◎우린 어디쯤 와 있나/선진국은 뛰는데 겨우 걸음마/통신망 가입자 불의 2.5% 뿐
외국 선진국들이 정보통신분야에서 숨차게 뛰고 있다면 우리는 겨우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미니텔과 같은 정보통신서비스는 우리나라에도 「천리안」 「HITEL」 등이 개발돼 사용되고 있으나 보급률·서비스 내용에서 프랑스는 물론 다른 선진국들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먼저 미니텔이 2만여종의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비해 천리안·HITEL 등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고작 4백여개에 불과하다.
또 가입자의 숫자도 천리안·HITEL 각각 15만명 수준으로 6백만명을 넘는 미니텔과는 비교가 안된다.
한편 종합정보통신망(ISDN) 분야에서는 아직도 초보단계에 있다.
최근 한국통신은 광섬유를 이용한 광대역 ISDN(BISDN)이 아닌 동선을 통한 ISDN을 올 8월부터 상용화하려 했으나 그나마 회선개발에 차질을 빚어 연기한 상태다.
정부는 최근 미국과 일본의 BISDN 개발계획에 자극받아 똑같은 개념의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계획」을 발표했으나 실현가능성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ISDN이 성공하려면 기업이나 연구소 자체의 지역전산망(LAN)이 보편화되는 등 사회전반의 정보화가 이룩돼야하나 이 자체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즉 차도 없는데 고속도로를 뚫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반면 ISDN망을 먼저 구축하는 것이 기업들의 정보통신망 이용을 촉진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하루 빨리 개발해야 한다는 반대의견도 있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논리다.
어쨌든 사회의 정보화 수준이 뒤떨어진 현재 여건으로는 광섬유를 통한 BISDN의 구축은 수요가 없어 요원하고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한 상태다.<남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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