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창간 28돌기념김대중 前민주당대표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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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부의 민족통일연구원 국민여론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의 80퍼센트가 북한을 도와주어야 하며,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대화를 통해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막상 긴급한 당면문제로 통일문제를 꼽은 사 람은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우리 국민들은 통일을 당연히 해야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상당히 요원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랬다.냉전체제 아래에서 우리는 美.蘇 두 초강대국에 의해 현상 고착의 틀에 마치 족쇄를 채인듯 묶여있었다.그 때는 통일이 당위의 문제였지 가능성의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소련은 멸망했고 냉전은 끝났다.이로써 우리를 묶고 있던 족쇄는 풀려버린 것이다.우리 민족끼리 통일하겠다고 합의만 하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가능성이 그러하다면 필요성은 어떠한가.지금은 냉전이 끝나고 세계적 규모의 경제전쟁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이제는 더이상 군사력이 국가의 힘을 상징하지 못한다.오직 경제력만이 국력의 척도가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경제는 중대한 도전에 부닥치고 있다.경쟁국인 동남아시아 국가와 일부 중남미 국가들에 자꾸 밀리고 있다.
여기에다 우리의 경쟁국들은 과거 국방비로 썼던 물적.인적 자원을 이제는 대부분 경제에 쏟아붓고 있다.우리만이 여전히 냉전시대의 안보 부담을 안고 방대한 자원을 국방에 쓰고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경쟁에서 급속히 뒤질 것이고 머잖아 삼류국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과거 아르헨티나처럼 선진국 문턱까지 갔다가 좌절하고 만 나라들의 예를 잊어서는 안된다. 앞으로도 남북한이 무장대결을 지속한다면 우리는 엄청난 분단비용을 계속 부담해야 한다.그러나 남북한이 평화공존 속에서 같이 협력해나간다면 우리가 10조4천억원이나 쓰고 있는 국방비를크게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이 국방비를 반만 절감해도 우리는30만명의 경제활동 인력과 5조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나머지는 통일비용과 사회발전에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을 하게 되면 남북한 모두가 큰 이득을 기대할 수 있다.
지금 남한의 자본.기술이 북한의 저렴하고 양질의 노동력과 결합하면 남한에서의 사양산업은 당장 국제 경쟁력을 회복하고 수년 내에 수백억 달러의 수출을 이룰 수 있다고 전문가 들은 말한다.거기에다 북한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다.금강산등 세계적인 관광자원을 개발해 남북한이 다같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지금 우리가 부닥치고 있는 국제적 장벽도통일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북방진출이 바로 그것이다.만주.시베리아.연해주.몽고.중앙아시아,이런 지역에는 무진장한 자원이 깔려 있다.지금 이 지역들은 우리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바라고 있다.이렇게 볼 때,최근 영국의 한국문제전문가가 지적한대로 남북한이 통일되면 일본에 이어 한국이 아시아의 또 하나의 슈퍼파워(초강대국)가 능히 될 수 있다.
그런데 북방진출을 하자면 우리는 북한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이제 이 지구상에서 마지막 자원의 보고라는 북방개척을 통해 우리가 세계 선진국가의 대열에 진입하는데도 통일은 필수불가결한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통일이 시급한 문제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많은 위험요소가 있다.자칫 잘못하면 동서독의 경우에서 보듯 북한의 낙후성때문에 큰 경제적 부담을 떠안게 될 수 있다.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착실하고 안전한 방향으로 통일을 추진해 모 처럼 남한에서이루어져가고 있는 민주화와 경제적 성과를 망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통일 방법으로 무력통일.흡수통일.상호협력을 통한 대등한 통일,이 세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무력통일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배제해야 한다.
통일독일의 실상에서 보듯 흡수통일도 큰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오죽하면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나를 만났을 때『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어도 마음의 장벽은 그대로다』고 말했겠는가.
한편 만일 우리 쪽이 북한을 흡수하려고 했을 때 이는 북한에엄청난 저항의 구실을 주게 되며,우리 안전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져오게 된다.지금 일부에서는 金日成 정권이 붕괴될 때 우리가북한을 흡수통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 는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북한 주민들은 동독 국민처럼 남한에 대한 압도적 선망을 갖고 있지는 않다.더구나 1백10만명의 거대한 병력을 거느린 북한 군부세력이 좌시할 리 만무하다.거기에다 중국이 흡수통일을 호락호락 받아들이겠는가.흡 수통일은 위험하고,가능성도희박하다.결코 바라서도 안된다.
통일의 남은 유일한 길은 북한과 대화를 통해 단계적으로 하는것이다.내가 주장하는 바 공화국연합제 방식으로 해나갈 때,현재남북한이 각기 독립국가로서 자기 문제는 자기가 책임지기 때문에큰 부담을 지게 될 이유가 없다.
내가 국가연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이유는,우리의 제1단계통일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조치이고 남북한이 영원히 갈라 서있을 독립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제1단계 공화국연합제 단계의 법률적 성격은 국가연합과 같다.
공화국연합제란 남북 양측이 각자 가지고 있는 외교.국방.내정에 대한 권한을 그대로 가지고 각기 독립국가를 유지한채 구속력이 약한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다.연합기구에는 남북 양측에서 동수의 대표가 나와 구성하되 만장일치제를 채택하여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의사를 강요할 수 없도록 안전판이 마련된다.공화국연합의 임무는 평화공존.평화교류.평화통일의 3원칙 실현에 집중된다. 첫째로 평화공존을 위해 어떠한 경우에도 무력대결이 있을 수없도록 군비축소,철저한 상호감시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둘째로남북한은 모든 분야에 걸쳐 교류를 점진적.전면적으로 실현시켜 상호이익 증진과 민족 동질성 회복에 전력을 다하 고 다음 단계의 연방제 진입을 준비하게 된다.
***핵문제 타결 가능 이렇게 양쪽이 한 10년쯤 해나가면 그 사이에 북한도 많이 변화해 마침내 다당제 민주주의를 수용할수 밖에 없을 것이고 지금의 중국처럼 시장경제 체제를 적극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중앙연방은 외교와 국방,그리고 중요한 내정문제에 대 해서만 관여하고 대부분의 지방행정은 지방자치정부에 의해 다뤄지게 될 것이다.이것이 성공하면「1민족 1국가」체제의완전통일로 들어가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누차 강조한 바 있지만 북한 핵문제는 일괄타결 방식을취해야 하고 이럴 경우 이 문제의 해결 가능성이 크다고 나는 보고 있다.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겠다고 나선것은 북한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이 존망의 기로 에 서있다는 현실적 절망감으로부터 주로 비롯된 것이다.지금 북한의 경제사정이어렵고 비참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대로다.남한에 의한 흡수통합의 공포를 갖고 있다.이 과정에서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자 강경파가 들고 일어서서 NPT탈퇴 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그동안 북한은 자기들이 수십년 동안 영구분단이라고 주장하며 극구 반대해 온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한 교차승인을 받아들이고,대한민국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는 남북합의서를 채택하는등 큰태도 전환을 보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그 들이 바라던 북한에 대한 서방세계의 수교와 경제협력등의 대가는 주어지지 않았다.이 때문에 북한은 이를 불공정한 사태라며 극도로 반발하고비난해왔다.
그래서 이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일괄타결 방식 밖에 없다.그러면 일괄타결의 내용은 어떠한 것일까.
첫째,북한 핵은 어떠한 경우도 용납할 수 없으며 이것은 결코양보가 있을 수 없다.
둘째,남북한은 서로 상대방의 안전을 철저히 보장하는 구체적인조치를 취해야 한다.북한의 기습공격 가능성도,남한의 팀스피리트훈련도 다같이 제거되어야 한다.
셋째,서방세계는 교차승인의 약속대로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열어야 한다.외교만이 아니라 경제협력.관광등으로 북한사회 전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북한체제까지 흔들릴만한 위험성을알면서 왜 북한은 지금 미국등 서방세계에 국교를 요청하고 경제협력을 갈망하는가.이유는 무엇보다 현재 북한의 사정이 너무도 급박하기 때문이다.金日成 주석이 그의 생전에 金正日에게 안심하고 정권을 넘길 수 있도록 남한과 서방세계와의 안정적 관계를 만들어 놓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또한 체제를 바꾸지 않고도 경제성장에 성공하고 있는 중국의 사례에 크게 고무된 것도 들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경제협력이다.결국 사람은 배부르면 웃고 배고프면화낸다.文化革命때의 中國과 오늘의 開放 中國이 그 단적인 예다. 최근 金日成 주석이 중국의 경제개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찬양했는데,이로써 이제 북한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중요한 시사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회담 과정을 지켜볼때 앞으로도우여곡절을 겪겠지만 양측이 서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상황이 이러하기에 우리가 일괄타결의 길로 나간다면 교착된 남북관계를 타개할 돌파구를 반드시 열 수 있을 것이다.
핵문제가 타결되면 공화국연합제를 실현하는데 큰 장애는 없어지게 된다.또 그 준비에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도 아니다.왜냐하면 현재 상태 그대로 남북한 두 공화국이 연합체제를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의 격변하는 세계를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그리고 우리의 미래와 살길은 통일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어떤 賢人은 말했다.『역사는 모든 민족에게 기회를 준다.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그 민족에게 달렸다.다만 명심할 것은 기회를 선용하지 않은 민족에게 역사는 반드시 준엄한 심판을 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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