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국(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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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제의 침탈로 빼앗기자 숱한 애국지사들이 망명정부 수립에 나선 것은 1910년대 중반부터의 일이다. 이들이 3·1독립운동을 전후해 국내외에 수립했거나 수립을 기도했던 임시정부는 여섯군데에 이른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맨 처음은 1917년 12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교민들이 결성한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다. 3·1운동 동참은 물론 파리 강화회의에도 대표를 파견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그해 9월 상해임시정부에 통합됐다.
국내에서 기도됐던 임시정부는 네개나 된다. 3·1운동 직후인 4월1일을 기해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기호지역에 수립하려 했으나 민족대표들이 모두 체포되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 서울에서 계획된 조선민국 임시정부도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4월9일 설립을 알리는 포고문까지 발표했다. 같은해 4월17일 평안도 일대에는 「신한민국 정부선언서」라는 전단이 살포됐다. 집정관에 이동휘,국무총리에 이승만이 추대됐음을 알렸으나 일제당국의 억압으로 결성에 실패했다.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는 천도교와 기독교·유교·불교 등 각 종단과 독립운동가들이 망라됐고,이승만이 집정관으로 추대됐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유일하게 광복을 맞을 때까지 임시정부로서 정통성과 법통성을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한 것은 1919년 4월13일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3·1운동을 계기로 이곳에 모인 독립지사들에 의해 발족된 상해임시정부는 이후 갖은 간난과 신고 속에서도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와 지원에서 독립군의 훈련에 이르기까지 조국광복에 분골쇄신했다.
상해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하다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객사하여 그곳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박은식·노백린·신규식·김인전·안태국 등 다섯분의 독립투사 유해가 광복 48년만에야 비로소 조국의 품으로 봉환돼 5일 국립묘지에 영면한다. 그러나 안중근·양기탁 등 87위의 독립투사 유해는 아직 변변한 유택도 없이 타국땅에 방치돼 있다.
이밖에도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채 구천을 떠도는 독립투사의 고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들의 소재파악과 봉환사업도 게속 추진해야할 우리들 후손의 도리요,책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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