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상처 씻는 클린턴의 “용기”/문창극 워싱턴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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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의 현충일인 5월31일 워싱턴의 월남전 기념식에서는 다른때 볼수 없는 소란이 일어났다.
5만8천명의 월남전 전사자 명단을 검은 화강암에 새겨 이를 벽으로 만든 기념비에 클린턴 대통령이 추도식을 위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가 월남전을 기피했던 것이 지난번 대통령선거 때도 문제가 됐듯이 월남전을 기피한 대통령이 이자리에 참석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연단에 등단하자 식에 참석했던 월남전 참전용사들은 클린턴을 거부한다는 표시로 등을 돌린채 연설을 들었다.
기념식 주변에 있던 전사자 가족들은 『병역 기피자』 『거짓말쟁이』 『이 겁쟁이야 닥쳐』 등의 야유를 퍼부었다.
사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자리에 꼭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
지난 81년 이 참전비가 세워진뒤 역대 대통령이 현충일에 참배초청을 받았지만 알링턴 국립묘지를 대신 참배해왔으므로 클린턴 대통령도 관례에 따라 알링턴 국립묘지로 갔으면 이러한 봉변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특히 월남전 참전용사회와 유가족들이 클린턴 대통령이 월남전 기념비를 방문한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격렬하게 반대했다.
백악관에 도착된 반대 편지만도 50만통에 이르렀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러한 반대속에서 봉변과 야유를 각오하고 참배를 시도한 것이다.
클린턴 대통렁은 『여러분들이 나에게 외치는 소리를 내가 다 들었으니 이제는 여러분들이 제말을 들어주십시오』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내가 4반세기 전에 월남전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여기에 서는 것을 막은 사람도 있지만 찬반은 자유의 특권이며,이러한 자유는 전쟁을 통해 얻었고 오늘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자리』라고 운을 떼고 『비록 우리가 이 전쟁에 대해 아직도 찬반이 엇갈리지만 더이상 이로써 우리 국민이 갈라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클린턴으로서는 자신의 봉변을 통해 역사의 단락을 지어보겠다는 결심이 있었던듯 싶다.
이러한 소란속에서도 단 한건의 폭력이 없었다.
참석했던 사람 가운데 다른 한편의 많은 사람들은 클린턴이 잘 와주었다며 반대자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비록 기념식장이 소란하기는 했으나 클린턴의 이러한 용기있는 행동으로 미국의 월남전 상처는 아물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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