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연치 않은 「베스트 11」 감추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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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축구에서 「베스트11」은 정해질 수도 없고 정해져서도 안된다.』
현재 베이루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94월드컵 축구 아시아 D조 l차 예선전에 출전하고 있는 한국 대표팀의 김호 감독은 취재진들의 『감독이 보는 베스트 11은 누구냐』는 질문에 이같이 주장, 기자들을 당황케 하고 있다.
김정남·박종환·이회택 등 전임 국가 대표 감독들은 취재진의 질문에 항상 당당히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베스트 11」을 밝힌바 있어 김 감독의 이같은 발언은 어떤 면에서는 신선한 (?) 자극제가 되고 있다.
국가 대표팀 전임 감독들은 대부분 「베스트 11」을 정해놓고 대회를 치르는 것이 통례였으며 변화가 있다면 주전들의 부상이나 당일의 컨디션에 따른 것으로 최소한 경기 하루 전에는 스타팅 멤버를 보도진에 알려주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달랐다. 홍명보·구상범·박정배 등 3∼4명의 선수를 제외하고는 상대팀에 따라 스타팅 멤버가 달랐으며 하루 전에도 항상 복수 또는 포지션별로 한두 선수를 추가로 취재진에 알려주었다.
「베스트 11」이 확정되어 있다면 다른 선수들이 훈련을 게을리 할 뿐 아니라 의욕을 잃는다는 것이다. 또 현대 축구는 격렬할 뿐 아니라 많은 체력 소모를 요구해 특정 선수에게 의존하기보다 전 선수, 혹은 최소한 16명의 선수가 가동되는 토틀 축구로 상대에 따라 「베스트 11」이 정해져야 한다는 것이 김 감독의 지론이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경기마다 선수의 잦은 교체는 선수에게 자신감을 잃게 할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팀웍 조성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대두되고 있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김호 감독의 주장이 무척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감독의 이론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한마디로 이번 대회에서 선수들이 수준 이하의 경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베스트 11」이 정해지는 것이 좋으냐, 아니냐는 차후 문제고 하루속히 대표팀을 재정비해 강화하지 않는다면 최종 예선전을 통과,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3회 연속 본선 진출이라는 한국 축구의 꿈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이 이곳에 온 국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베이루트 (레바논)=임병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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