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의 아베호 … 어디로 (上) "칠난팔고 … 개혁할 것 아직 많다" 버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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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일본의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이 참패했다. 좀처럼 드러내 놓고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 일본의 유권자들이 '한 표'로 아베 정권에 심판을 내렸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총리직을 고수하겠다고 밝혀 유권자들이 내민 '레드 카드'를 스스로 '옐로 카드'로 바꿔 버렸다. 벼랑 끝에 몰린 자민당 집행부도 어쩔 수 없이 이를 용인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당장 참의원 제1당으로 부상한 민주당이 가만 있지 않을 태세다. 물론 이를 악문 아베의 반격도 간단치 않을 듯싶다. 격랑에 휩싸인 일본 정국을 상.하 두 차례에 걸쳐 심층 진단한다.

"나에게 칠난팔고(七難八苦)를 다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자민당의 선거 참패가 확실시되자 총리 관저의 한 측근에게 털어놓은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처음 쓴 이는 전국시대 산인(山陰) 지방의 충신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鹿之介). 주군으로 모시던 다이묘(大名.영주) 아마고(尼子) 가문이 몰락하자 "반드시 가문의 재건을 이루겠다"고 맹세하며 한 말이다. 그렇다면 아베 총리가 가문의 고향 선배이기도 한 야마나카의 말을 이 시점에 인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베 총리의 말에는 "이번 참패로 정치 명문가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결코 이렇게 물러설 수 없다. 반드시 그 영광을 재건하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집약돼 있다. 그건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장녀이자 아베의 모친인 요코(洋子) 여사의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29일 밤 즉각적인 '퇴진 거부' 발표로 나타났다.

도쿄 시민이 30일 아베 신조 총리의 참의원 선거 참패 소식을 전하는 뉴스 전광판 앞을 지나고 있다. 전광판의 닛케이지수는 전날 대비 221.45포인트 떨어진 1만7062.36을 기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아베 총리의 '대안 없는 버티기'가 일본 금융시장과 경제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도쿄 로이터=연합뉴스]

29일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얻은 의석은 37석. 민주당은 60석이다. 이런 규모의 참패는 자민당 52년 역사 중 1989년의 우노 소스케(宇野宗佑) 정권이 얻은 36석에 이어 둘째다. 상식적이라면 고개를 숙이고 즉각 퇴진하는 게 순리다. 정권교체는 중의원 선거가 좌우하지만 89년의 우노 총리, 98년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44석) 총리도 참의원 패배 이후 책임을 졌다. 그러나 아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민당 내부 사정 간파해 정지작업 성공=아베는 이미 참패를 예언하고 손을 써놨다. '포스트 아베' 1순위로 거론되던 아소 다로(生太郞) 외상을 29일 선거 당일 낮 총리 관저로 불러 '주저앉히기'에 성공했다. 15명의 의원밖에 없는 군소파벌 출신인 아소는 지금 나서 봐야 승산 없는 게임이라는 걸 알고 마음을 돌린 것이다. 아베의 출신 파벌 수장인 마치무라 노부다카(町村信孝) 전 외상도 아베 총리의 부탁을 받고 신속히 움직였다. 그는 29일 당내 제2파벌인 쓰시마파(津島派.옛 하시모토파)의 수장 쓰시마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거당적으로 대응하자"며 '자숙'을 당부했다. 현재 각료가 한 명도 없는 쓰시마파로선 아베 총리에게 '빚'을 지게 하고 향후 있을 내각개편에서 배려를 유도한다는 계산이었다. 다른 파벌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자민당은 30일 주요 당직자 회의를 열어 아베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처럼 아베는 현재 자민당에 '아베 끌어내리기'에 적극적으로 총대를 메고 나설 에너지도 박력도 없는 것을 간파했다. 하시모토 총리 퇴진 때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라는 강력한 후계 후보가 있었고, 그를 밀어준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라는 막강한 '킹 메이커'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인물도 없거니와 파벌의 결속력도 떨어진 상태다.

선거 참패에도 당총재와 총리직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전임자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가 당내 파벌을 모래알처럼 깨부순 덕분이다. 고이즈미는 '구조개혁' 명분 아래 지방 공공사업을 축소하는 바람에 이번 패배의 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개헌에 대한 집착도 작용=아베가 퇴진을 거부한 또 다른 이유는 개헌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그는 30일 기자회견에서도 "국민투표법안이 통과된 뒤 3년간은 개헌안 제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동안 확실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개헌의 길을 확실히 마련한 다음에 물러나야 차기 총리가 들어서도 그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베의 한 측근은 "향후 정권의 구심력 회복을 위해서도 개헌작업을 가속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정국의 쟁점이 개헌이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아베가 산인지방의 충신 야마나카의 말을 인용하며 '퇴진 불가'의 의지를 다졌지만, 사실 야마나카는 주고쿠(中國) 지방의 적군 모리(毛利) 가문에 의해 살해당하고, 결국 아마고가는 재건에 실패했다. 아베의 집착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 것인지 주목된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아베 총리 사임 안 해도 되나=정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중의원 선거다. 중의원이 총리 선출권을 갖고 있고, 현재 자민당은 중의원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고 있다. 참의원 선거에서 패하더라도 반드시 총리직을 내놓아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역대 총리들은 참의원 선거에 대패했을 경우 원활한 국정운영을 할 수 없다고 판단, 사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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