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영화 '화려한 휴가'의 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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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대선주자들이 영화 '화려한 휴가'(25일 개봉)로 몰려가고 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다. 30일 정동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이 서울 신촌에서, 전날에는 이해찬 전 총리가 용산에서 이 영화를 봤다. 한명숙 전 총리와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은 지난주 광주에서 관람했다. 한 전 총리는 김홍업 의원.박광태 광주시장.박준영 전남지사 등 김대중 전 대통령 측 인사들을, 천 전 장관은 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한 인사들과 팬클럽회원 등을 동반했다. 개봉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영화에 여권 인사들이 큰 관심을 보이는 건 이례적이다.

범여권 주자들의 잇따른 극장 나들이에선 한나라당 경선에 집중된 유권자들의 시선을 범여권으로 돌리려는 마음이 엿보인다. 5.18을 상기시키는 이 영화를 통해 범여권 지지표의 출발지인 광주의 표심에 호소하고, 자신의 '민주 정통성'을 알리는 기회로도 판단한 것 같다.

정치컨설팅 '민'의 박성민 대표는 "범여권에선 이 영화의 관객이 500만 명을 넘으면 대선에서 이긴다는 말도 나온다는데, 이는 근거 없는 주장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인식의 문제는 범여권의 갈등을 덮는 효과가 있다"며 "한나라당에는 유리하지 않은 이슈"라고 분석했다.

정작 영화사 측은 정치권의 때이른 관심이 반갑지 않은 분위기다. 투자.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의 이상무 홍보팀장은 "정치인들의 관람은 자유지만 전국적인 감동을 겨냥한 영화가 정치에 휘둘리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제작사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 역시 "달갑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안 그래도 정치적 선입견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있는 마당에, 영화에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유 대표는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유인태 의원의 친동생이다. 상업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그는 "(현대사를 소재로 한)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가 관객 1000만 명을 넘어서는 것을 보고 5.18도 대중영화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화려한 휴가'는 한국영화로는 대작급인 100억원대 제작비를 들인 상업영화다. 5.18 당시의 비극을 택시기사.간호사.퇴역군인 등 지식인이 아닌 일반인의 관점에서 풀어냈다. 눈물과 웃음을 고루 등장시킨 전형적 대중영화다. 29일 현재 전국 관객 143만 명을 기록했다. 초반 기록만 따지면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중 가장 좋은 성적이다.

영화마케팅 전문가 채윤희(올댓시네마 대표)씨는 "정치인의 관람이 관객.흥행 등에 영향을 준다면, 영화시장의 주 관객인 20대보다 극장 나들이가 드문 중.장년층이 될 것"이라면서 "취임 초반 인기가 높았던 김영삼 대통령이 '서편제'를 관람해 흥행에 큰 도움이 된 적이 있지만 지금과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후남.채병건 기자<hoonam@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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