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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대담] “중국 위협받는 한국, 한미 관계 강화로 샌드위치 벗어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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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지난해 말 최신작 <부의 미래>를 들고 방한했던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6개월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중앙일보>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가 그를 만났다. <부의 미래>에서 미처 드러나지 않았던 앨빈 토플러의 세상 읽기-.



■ 환경·빈곤 지원이 유행어… 문화 차이 딛고 기부 움직임 확산
■ 시장경제에도 정부 역할 필요… ‘시장근본주의’는 위험하다
■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보유 확신… 어디론가 빼돌렸을 것
■ 북한이 6자회담과 남북대화의 속도 장악한 것은 불행
■ 젊은 세대 ‘세컨드라이프’ 가상현실 사이트에 열광하는 것 이해 못 한다
■ 관료주의 비효율 확산… 기업의 관료주의 성향도 심각
■ 일직선 고속질주 ‘중국경제’ 脫線 우려

일시_2007년 5월31일 오후 4시올해 79세의 노학자 앨빈 토플러. 미래를 내다보는 그의 식견은 좀처럼 무뎌지지 않는다. 여행 자체를 즐긴다는 그는 “전 세계를 돌며 강연과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나 역시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에 전혀 힘들지 않다”고 말할 정도다.

미국 뉴욕 출생의 세계적 미래학자인 토플러는 1970년 펴낸 <미래의 충격>과 1980년 내놓은 <제3의 물결>로 명성을 얻었다. 여든을 앞둔 나이지만 지난해 <부의 미래>를 내고 전 세계를 돌며 강연과 인터뷰를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방대한 자료 수집과 인터뷰를 토대로 책을 써 집필 기간이 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부의 미래>는 11년, <제3의 물결>은 10년, <미래 충격>은 5년 걸렸다. 얼마 전까지는 직접 자료를 수집했으나, 최근에는 저널리스트 출신 비서를 채용해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조력자는 부인 하이디다. 그는 “집 밖으로 나가는 모든 글은 보통 내가 먼저 쓴 뒤 하이디가 읽고 토론을 거쳐 수정한다”며 “아내는 날카로운 비평가이자 동료”라고 말한다. 그는 최신 저작 <부의 미래>에 부인 하이디의 이름을 공저자로 올렸다.

한국능률협회(KMA) 초청으로 방한한 토플러 박사를 김영희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가 만났다. 두 사람은 토플러의 최신작 <부의 미래>에서 비켜난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토플러 박사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미국은 잘못된 나라를 골랐다”고 말한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라크를 공격한 것인데,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을 때는 이미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이란에 넘긴 뒤라는 주장이다. 때문에 그는 미국이 이라크전쟁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이란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민주주의 확산을 통한 평화 정착’이라는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순진한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민주주의는 최소한 2차 물결 내지 3차 물결 수준의 경제적 토양이 마련된 나라에서나 가능한 제도이지, 단지 선거를 치른다고 해서 이룩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토플러 박사는 중국의 미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모든 역사는 일직선으로 발전할 수 없으며, 중국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단지 국내총생산(GDP) 등의 수치만 보고 중국이 2020년까지 슈퍼파워로 성장한다는 경제학자들의 예측은 너무 단순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지도자들을 높이 평가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속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중국의 경제발전 속도를 잘 조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샌드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미국, 이란과 대화로 이라크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김영희(중앙일보 대기자)최신 저서 <부의 미래>에서 박사님께서는 미래의 부(富)가 어떻게 변화하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지를 국가와 사회 차원에서 논했습니다. 박사께서는 개인이 부를 창출하고 소비하는 데서 동아시아인과 서양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십니까?

앨빈 토플러(미래학자) 아시아의 세금제도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만, 미국의 세금제도는 개인이 부를 비영리기관(NPO)이나 비정부기구(NGO)에 기부하는 것을 장려합니다. 이러한 세제 혜택은 억만장자만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개인도 교회·학교 등 주변의 작은 기관에 기부합니다.

▶ 대담중인 앨빈 토플러(오른쪽)와 김영희 대기자.

즉, (미국인들이) 기부하는 이유에는 경제적 인센티브가 많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화적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만약 우리가 ‘억 달러’의 부를 만들었다면,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돈을 쓰는 행위에 대해 동서양의 차이는 정확히 모르지만, 기부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것 같아요.

김영희 록펠러·포드·카네기 등의 기부 행위가 단지 그들이 (기부할) 능력이 있어서라고 보시는지요? 아니면 돈을 어떻게 벌고 썼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라고 보십니까?

토플러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이 기부문화의 활성화를 선도하고 있죠. 가치와 아이디어가 국경을 넘나들 수 있게 된 세계화의 영향도 있고요. 흥미로운 것은 기부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살펴보면 시대마다 유행이 있다는 점입니다. 요즘은 환경과 빈곤문제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 후에는 더욱 다양한 목적으로 돈을 기부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이 하는 기부 총액이 얼마나 되는지, 또 기부 총액에서 몇몇 부자의 기부액이 몇 %나 되는지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김영희 만약 ‘억만장자(billianaire)’들이 부를 정직하고 합법적으로 만든다면 왜 죄책감을 느낍니까?

토플러 경우에 따라서죠. 그들의 출신 배경이 어떠하냐에 달렸습니다. 애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괜찮겠지만, 매우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형제·친척·친구들이 여전히 경제적으로 불행한 삶을 산다면 죄책감이 들겠죠. 이 질문에는 시장경제 시스템에 관한 제 견해를 묻는 것이 포함돼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시장경제는 100% 믿습니다. 하지만, 1,000% 확신하건대 시장경제에는 부유한 개인의 기업이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정부의 개입이나 지도력이 요구되는 이유죠. 사회에는 어떤 기업이나 개인도 투자하기를 꺼리는 10~15년짜리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기본적으로 시장경제에도 정부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저는 근본주의자는 아닌 것 같아요.

김영희 부자 나라 미국은 왜 천문학적 돈을 이라크에 쏟아부으면서 아프리카의 기아와 에이즈 피해자를 돕는 데는 인색합니까?

토플러 이라크에 쏟아부은 돈의 대부분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니까요. 언론이 말하는 천문학적 전쟁비용은 한 부분만 보고 두 세 단계 뒤는 간과한 것입니다. 정확한 금액은 모르지만, 저는 미국 정부가 이라크에 쏟아부은 돈이 국방부를 통해 민간 계약자들에게 가며, 궁극적으로 이 돈의 상당부분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고 봅니다. 또 하나,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결과적으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었든 없었든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 이론을 믿습니다.

김영희 이론이라면?

토플러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을 수 있다는 이론이죠. 찾지는 못했지만요. 저는 미국이 잘못된 나라를 골랐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차 걸프전 당시 첫 주에 사담은 수백 대의 전투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전부 이란에 넘겨줬죠.

김영희 이란에 말입니까?

토플러 예, 이란이요.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공군을 1차 걸프전 때 이란에 그대로 넘겨 줬습니다. 수백만 명의 인명이 희생된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말이죠. 만약 그가 공군을 이란에 줬다면 생화학무기를 시리아나 이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에 넘겼을 수 있습니다. 가능성이 작을 수는 있지만요. 하지만, 저는 후세인이 과거에 한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백악관 관계자 중에서도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믿은 사람이 꽤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일직선적 발전에 의심”

김영희 미국이 이라크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방도가 있나요?

토플러 글쎄요, 제 전공 분야는 아니지만 한 사람의 미국인으로서 답한다면, 미국은 이란과 대화해야 합니다. 이라크전쟁에는 많은 측면이 있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싸우는 종교의 측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싸우는 대리전, 국가 간 전쟁과 길거리 갱들의 전쟁 등입니다. 때문에 이라크전쟁에는 온갖 측면의 폭력이 뒤섞여 있어요. 미국은 국가에 초점을 맞춘 서양의 시각에서 전쟁을 시작했는데, 상대는 종교적 전쟁을 하고 있어요.

김영희 박사께서는 <부의 미래>에서 남한의 ‘빨리빨리’ 정신과 북한의 ‘시간 끌기’ 작전을 비교했습니다.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남북대화나 6자회담이 갑작스럽게 속도를 내거나 급작스럽게 중단될 수도 있겠습니까?

토플러 때로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있습니다. (6자회담은) 중대하고 의미심장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너무 많은 당사자가 연관돼 있어 속도를 통제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시간(time)은 제가 책에서도 언급했듯 매우 중요한 기반입니다. 더구나 제가 보기에 현재 6자회담과 남북대화의 속도를 북한이 장악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에요.

김영희 미국과 일본의 군사동맹의 보호막 없이는 아시아가 빠른 경제 발전과 지역 안정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는 박사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중국이 미국과 일본의 동맹에 맞서는 초강대국으로 등장하면 사정은 어떻게 달라질 것이라고 보십니까?

토플러 우리가 중국을 말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결코 역사는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에 관해 쓴 것 중 상당수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직선으로 추정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입니다.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GDP 등 전통적 경제 수치만 보고는 알 수 없습니다. 중국은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국가입니다. 한 해 7,000~8,000건의 폭력시위가 있었다는 중국 경찰의 통계수치 발표는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저는 중국이 2020년까지 슈퍼파워가 될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예측이 너무 단순하다고 봅니다.

“관료주의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조직 필요”

다른 한편으로, 중국 정부의 지도력은 정말로 뛰어납니다. 그들은 제가 방금 말한 시간과 속도를 잘 이해하고 있어요. 그들은 발전 속도를 잘 조절해 왔고, 지금도 잘 조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외부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보다 (속도 조절의 중요성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질문으로 돌아가서, 중국이 앞으로 10~20년 동안 평화로운 상승 기조를 잘 유지할 것이냐 혹은 무엇인가가 일어나 탈선할 것이냐에 대해 답한다면, 저는 항상 직선적 발전에는 의심을 품는 사람이라고 답하겠습니다.

김영희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시는군요?

토플러 그렇습니다.

김영희 <부의 미래>에서 휴대전화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해 중국 정부가 더는 국민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전제로, 제2의 마오쩌둥(毛澤東)이 나타나 현 체제를 뒤엎고 사회를 장악할 수 있다는 흥미로운 시나리오를 제시하셨습니다. 이 시나리오는 현실성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단지 가능성입니까?

토플러 매우 흥미롭고 도발적인 발상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안적 미래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물론 이 시나리오는 1850년대 근대 중국의 폭동을 겪어본 중국인보다 외국인에게 더 비현실적으로 들릴 것입니다. 저 역시 역사가 똑같이 반복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시나리오를 일상적 토론에서 제외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가정과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중국이 수천만 명의 절대적 빈곤층을 줄인 것은 전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 중국이 국민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되면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끔찍한 일이고, 어떻게든 피해야만 하는 일이죠.

미국이 50년간 태평양지역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중국에 대해서도 미국이 어느 정도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미국이 통제력을 행사하는 한 중국이 단지 자존심을 위해 대만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중국이 우발적으로든, 누군가가 공산당에서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든 태평양에서 미국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국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든, 또 어느 정도 멍청하든 큰 맥락에서 보면 아직 태평양지역의 안전장치로 필수적 존재입니다.

김영희 휴대전화·인터넷 같은 첨단 정보기술(IT)의 발달이 젊은이들을 일종의 유목민으로 만들어 학교와 가정의 모든 권위와 감시로부터 탈출하게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토플러 IT가 그들 사이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으로 봐야겠죠. 혹은 한시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연결고리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의 일부분이 돼가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고요. 가상현실 사이트인 ‘세컨드라이프(http://secondlife.com)’에서 하루에도 몇 시간씩을 보내는 젊은이들을 저도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요. 저 역시 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번 주만 해도 차베스 정권에 대한 반대 시위가 베네수엘라에서 있었는데, 보도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휴대전화로 경찰이 어디에 있으니 어느 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등의 정보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기술 발전이 점점 더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이죠. 차베스 정권은 전화 시스템을 꺼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발에 총을 쏘는 것과 같아요. 그렇게 한다면 베네수엘라 경제도 멈춰버릴 테니까요.

김영희 그런 상황에서 IT가 사회와 공동체를 해체하는 것은 아닙니까?

토플러 앞으로 인류는 매우 강한 운동 또는 동맹의 태동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몇몇은 합리적으로 인류에 도움이 되겠지만, 광적이고 분파적인 종교집단도 형성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발전한 기술과 후진적 사회 제도의 차이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회의 제도는 기본적으로 관료주의적 구조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것들은 산업사회에 맞게 적절히 만들어졌죠. 하지만 이것들은 현재 아주 간단한 임무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미 관계 공고화로 샌드위치 벗어나야”

미국을 예로 들어 보죠. 미국에는 연방정부와 비정부기구, 그리고 주정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관료주의로 인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죠. 정보기관 간에도 비슷합니다. 미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은 서로 대화하지 않을뿐더러 늘 싸우고 있습니다. 지역 경찰과 FBI도 그렇고요. 관료제의 핵심은 각 부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을 나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료제의 특성상 여러 부서가 생기게 마련이죠. 그러나 이들은 과거에는 효과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맞지 않습니다.

김영희 그렇다면 IT 시대에 맞는 적절한 제도는 어떤 형태가 돼야 합니까?

토플러 정답은 없습니다. 시도해볼 만한 것은 여러 개가 있겠죠. 그중 몇몇은 훌륭할 수도 있고, 몇몇은 끔찍할 수도 있고요. 정부만큼이나 사기업의 관료주의가 심각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사회적 분쟁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술혁명 그 자체는 과거와 싸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요 기관의 구조나 제도를 변화시키려 할 때 이로 인해 직장이나 직업을 잃게 된 사람들은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죠. (IT시대에 맞게 사회를)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많은 소요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영희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지구촌시대를 만든 요즘에도 한국·일본·중국에서는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립니다. IT 시대에 민족주의는 얼마나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을까요?

토플러 정치인들이 미디어를 통해 민족주의를 악용하는 것을 중단할 때까지이지요. 민족주의는 국가가 점점 약해질 때 나타납니다. 세계화와 기술의 발전으로 국가는 독점적 권력을 잃었습니다. 근대적 국가의 탄생 이후 처음 있는 일이죠. 이제 국가는 다국적기업과 NGO, 유엔 등과 권력을 공유하고 경쟁하면서 국가의 역할을 해나가야 합니다. 국가가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이유죠.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흔히 근대국가의 개념은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조약에 근거한다고 알고 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조약을 읽어봤는지 모르지만, 제가 최근에 이 문서를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우리가 근대국가의 효시(?)로 여기는 이 조약 내용의 99%가 땅따먹기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왕자가 얼마만큼의 땅을 어느 가격에 가져갈지가 조약 내용의 거의 전부입니다. 이 조약에 있는 딱 두 문장 “그런데, 쳐들어오지 마(by the way, don’t invade me)” 때문에 이 조약이 근대국가의 효시로 알려지게 된 것이죠.

김영희 흥미롭네요.

토플러 결론적으로 오늘날 민족주의는 국민의 관심을 국내문제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이용되는 것 같아요.

김영희 샌드위치 신드롬이라는 말이 요즘 한국사회에서 일고 있습니다.

토플러 샌드위치 신드롬이요?

김영희 최근 한국이 저가 시장은 중국으로부터, 고가 시장은 일본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죠. 안보에서도 비슷하고요. 중국이 슈퍼파워로 성장하는 가운데, 일본이 이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무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두 이웃과 미국 사이에서 어느 쪽에 서야 할까요?

토플러 음…. 한국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저는 여전히 핵심적 관계는 미국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어떤 약점이나 실수가 있을지라도 태평양권역에서 여전히 균형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역할이 줄어든다면 태평양은 모두에 더 위험한 곳이 될 것입니다. 펜타곤은 중국의 군사비를 매우 관심 있게 관찰하고 있고, 이것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김영희 핵 문제에 대해 미국은 이중적 잣대가 있습니다. 인도와 이스라엘의 핵문제에는 눈을 감고 북한과 이란의 핵무장 저지에는 온갖 수단을 동원합니다. 미국의 이런 정책이 정당합니까?

토플러 거기에는 논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단순계산으로는 모두 동등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잠재적 위협이 모두 다릅니다. 우리는 잠재적 위협에 대응해야 합니다. 일률적 논리가 적용될 수 없는 이유죠. 인도는 파키스탄과 수십 년간 싸우고 있지만, 파키스탄 이외의 다른 나라를 침공하거나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개연성은 아주 적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그런 보장이 없습니다.

“거대 중국은 산업화시대의 산물일 뿐”

김영희 <부의 미래>에 중동과 아랍 등 이슬람 국가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중국을 미래의 부와 안보로 규정할 때, 아랍 무슬림의 곤궁은 미국인과 유럽인, 아시아인들을 우려스럽게 합니다. 중동지역과 중동인, 또 이들의 종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토플러 이슬람에 대해 많이 읽고 공부했지만 내 결론에 대해 자신이 없어서입니다.

김영희 중국어가 머지않은 미래에 인터넷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가 될 것이라고 예측(predict)하셨습니다.

토플러 잠시만요. 저는 예측(predict)이라는 말을 피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측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수준의 확실성을 내포하거든요. 어쨌거나,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김영희 그 이유가 미국인이나 유럽인, 혹은 한국인이 중국어를 배우리라고 보시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중국인이 절대적으로 다른 인종보다 많기 때문입니까?

토플러 이것을 지난 수년간 말해왔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저는 점점 더 나은 수준의 자동번역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기는 하죠. 지금까지 제가 본 대부분의 자동번역기는 썩 훌륭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더욱 훌륭한 자동번역기를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 더욱 훌륭한 자동번역기가 만들어진다면, 이것은 큰 화제가 될 것입니다.

중국을 논할 때 흔히 규모에 초점을 맞추는데, 저는 규모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규모가 커야 성공한다는 것은 대량 생산체제의 사고입니다. 우리는 현재 그 너머에 있습니다.

지금은 틈새·맞춤형 생산시대입니다. 부강한 나라가 되는 데도 역시 크기는 상관없습니다. 싱가포르를 비롯한 아일랜드·핀란드를 보세요. 두바이만 봐도 작은 나라가 단지 생존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데는 많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을 말할 때 규모를 언급하게 되는 것은 단지 중국이 지금 제2물결인 산업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영리합니다. 그들은 단지 규모가 과거 시대의 요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미 그 너머를 보고 있습니다.

김영희 하지만 덩치가 큰 중국 옆에 있는 한국은 그 규모에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토플러 그렇다면, 이사 가야죠(웃음).

김영희 하기는 그렇습니다. 한국 속담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토플러 (중국의 규모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중국은 제 말에 매우 기분이 나쁠지 모르지만, 저는 중국이 과연 50년 혹은 100년 후에도 하나의 중국일지 생각해볼 만하다고 봅니다.

김영희 여러 개의 중국일 수 있겠죠.

토플러 지방분권이 강해질 수도 있고, 중앙으로부터 지금보다 더 많은 독립이 이뤄질 수도 있어요. 이슈가 중앙이 아니라 지방 정부로부터 제기될 수도 있죠. 저는 하나의 거대한 중국이라는 생각 자체가 산업화시대의 산물이라는 생각입니다.

김영희 헌팅턴도 <문명의 충돌>에서 중국이 최소한 네 개로 나뉘는 시나리오를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토플러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김영희 부시 정부는 이라크에 서구식 혹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라크에서의 실패가 미국이 민주주의 확산을 통한 평화 정착이라는 정책을 포기하도록 할까요?

토플러 민주주의 확산을 통해 평화를 이룩한다는 것 자체가 사기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개념을 너무 단순화한 것입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선거가 전부는 아닙니다. 이라크에서 선거를 치르기는 했지만 수백만 명의 이라크 여성은 아직 노예 상태입니다. 이것을 과연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민주주의를 정치적 수사학으로 정의하는 것 역시 저는 너무 단순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진행되는 많은 논의에서 민주주의가 경제 발전과 연관돼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힐러리는 빌만큼 똑똑하지 못해”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소작농으로 그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1차 물결, 즉 농업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미국에서도 민주주의는 훨씬 후에 이뤄졌습니다. 민주주의에는 최소한의 조건이 필요해요. 적어도 2차 물결 혹은 3차 물결 정도의 발전이 이뤄져야 합니다. 상대국의 문화·경제 환경을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플러그 꽂듯 집어넣는 것은 순진한 발상입니다.

김영희 마지막 질문입니다. 내년은 미국 대선의 해입니다. 첫 번째 여성 대통령 혹은 첫 번째 흑인 대통령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토플러 상당히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첫 번째 여성 대통령과 첫 번째 흑인 부통령을 갖게 될 가능성도 있죠. 저는 기자로서 수년을 백악관과 의회에서 보냈습니다. 약간의 백악관 경험으로 미뤄볼 때 선거 1주일 전까지도 우리는 결과를 절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전세가 완전히 역전될 수도 있으니까요.

김영희 한국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경쟁 관계에 있는 이명박 전 시장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 주기 위해 김정일이 무력 도발을 일으킬 수도 있죠. 일반적으로 북한이 도발을 일으키면 한국 사람들은 카리스마가 있는 후보에게 기우는 경향이 있거든요. 어쨌거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라는 요소가 어떻게 작용할 것으로 보십니까?

토플러 잘은 모르겠지만,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은 잘 해낼 것입니다. 빌 클린턴은 정말 똑똑합니다. 민주당 당원대회에 초대돼 민주당 사람들과 1박2일가량 함께 보낸 적이 있는데, 그때 빌 클린턴이 연설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훌륭했죠. 단지 훌륭한 것 이상이었어요. 매우 지적이었죠. 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대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제 생각에 힐러리는 클린턴만큼 똑똑하지는 않아요. 힐러리에게는 빌 클린턴 같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거든요. 단지 힐러리가 여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힐러리에게는 대중에게 적대감을 일으키는 무엇인가가 있어요. 때문에 사람들은 힐러리를 관용하든지 증오하든지 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대중이 힐러리를 피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김영희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앨빈 토플러는 누구?

<제3의 물결>로 스타덤 오른 저널리스트 출신 미래학자
1949년 뉴욕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중서부 공업지대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 관련 잡지에 글을 기고해 문필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저널리스트가 됐다. 처음에는 백악관 담당 정치·노동문제 기자로 일했으나 차츰 비즈니스 분야로 활동의 터전을 넓혀 1957~58년 <포천>지 백악관특파원, 1959~61년 <미래>지의 부편집자로 활동했다. 1964년에 쓴 <문화의 소비자>에서 날카로운 통찰력이 주목받았으며, <미래의 충격>(1970)으로 그 위치를 확고하게 다졌다. 지식정보사회 출현을 예견한 <제3의 물결>(1980)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미래학자로 자리매김한 그는 이후 <권력이동>(1990) <부의 미래> (2006) 등 거작을 내놓았다. 코넬대 객원교수를 역임했으며, 마이애미대 등 5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리_오효림 월간중앙 기자 hyolim@joongang.co.kr

사진_강욱현 월간중앙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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