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의펜화기행] 조선후기 상업의 중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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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종이에 먹펜, 30X40cm, 2007.

서소문(西小門)은 태조 5년(1396)에 만들어졌습니다. 첫 공식 명칭은 소덕문(昭德門)이었다가 후에 소의문(昭義門)으로 바꾸었습니다. 처음엔 문루(門樓) 없이 옹성만 둘렀던 것을, 영조 20년(1744)에 새로 문루를 세웠습니다. 서소문은 인천과 강화를 잇는 관문으로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체를 도성 밖으로 내갈 수 있는 문이었습니다. 조선후기 성문 밖에 칠패시전이 생겨 상업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대한제국 시절, 서소문 안에는 물지게를 지던 물꾼에서 대신으로 출세한 이용익이 살았고, 문 밖에는 상점의 하인으로 법부대신 자리까지 올랐던 이하영의 집이 있었습니다.

 빠른 발로 소문난 이용익은 짧아도 닷새는 걸린다는 전주∼한양 간을 12시간 만에 주파해 고종과 명성황후를 놀라게 합니다.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한 황후와 고종 간의 긴밀한 소식을 번개같이 전달해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습니다. 그 공로로 단천부사를 거쳐 병사로 승진해 황실의 재정을 도맡는 실세가 됩니다. 친러파인 이용익은 일본이 득세하면서 러시아로 망명했습니다만, 많은 재산을 육영사업에 쾌척해 남은 재산이 없었답니다.

 

중앙일보 야외주차장 자리에 있는 서소문(소덕문)터 비석.

부산 상점 하인이었던 이하영은 한양으로 올라와 미국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 박사의 심부름을 하며 영어를 배웁니다. 미국 유학 뒤 미국 주재 공사관의 서리 공사가 된 이하영은 1000여 명의 명사를 초대해 워싱턴 역사상 가장 큰 댄스파티를 개최합니다. 갓 쓴 도포 차림에 유창한 영어와 능숙한 춤 솜씨로 ‘상투 멋쟁이’라 불리며 인기가 대단했답니다. 이탈리아 육군 대신의 딸이 이하영에게 반해 청혼했으나 국법에 어긋난다고 거절하자 그녀의 어머니가 이탈리아 황제로 하여금 고종 황제에게 국제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청을 넣기도 했답니다. 이후 일본 주재 공사, 외부대신, 법부대신에 이르는 파격적인 출세를 합니다.
 구한말의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서소문은 1914년께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습니다. 서울 중구 순화동 중앙일보 사옥 야외주차장 자리가 옛 터입니다.

김영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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