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정책 부실화 피해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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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의 임금정책이 크게 바뀔 전망이다. 정부는 최근 1년동안 실시해온 총액임금제를 철회하고 민간기업의 임금결정을 노사자율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다만 정부투자·출연기관에 대해서만 총액임금을 3%이내로 억제한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 임금정책의 이같은 급선회는 그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있다. 5%의 상한선을 못박은 총액임금제가 그동안 노조측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5%의 임금인상조차 불가능한 일부 사양업종에서는 오히려 임금상승을 부채질하는 부작용을 낳았으며,총액임금제의 보조수단으로 시도된 성과급이 노사간의 새로운 갈등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무엇보다 경제·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민간자율의 확산이 요청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업의 임금결정에 대한 정부개입을 마냥 끌고 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수긍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같은 명분의 자명함 때문에 정부의 새 임금정책이 고스란히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87년이후의 고임금행진 속에서 임금정책의 주된 목표가 임금안정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임금문제의 전부는 아니었다.
정부가 작년 총액임금제를 도입하면서 기업규모별 임금격차의 해소와 복잡다단한 임금체계의 개선을 강조했을 때 임금정책의 밑바탕을 이루는 폭넓은 문제의식을 좋게 평가하고 정책성과에 큰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 적지않았던게 사실이다. 바로 그런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금년에도 정부는 총액임금제로 해결코자 시도했던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대책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임금격차와 임금체계의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상태에 있으며 그것이 노사자율의 협상을 통해 해결되기를 바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엄청난 임금격차는 중소기업경영난의 핵심에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닌다. 중소기업의 인력난·자금난·기술부족·경영부실의 원인이 모두 대기업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임금수준과 연결된다는 것을 정부가 더 잘 알 것이다. 이 문제를 방치하는 한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백약이 무효가 될지도 모른다. 30인미만 중소기업과 5백인이상 대기업 사이의 임금격차는 86년에 10% 가량 이었으나 91년에는 40%에 육박했고 주로 고임금기업에 적용된 총액임금제가 이 격차를 크게 완화시켰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총액임금제의 철회가 임금정책의 부재나 부실화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노사자율로 넘겨진 새해 임금협상이 비단 임금의 상승폭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임금체계개선과 기업규모별 격차해소에도 주력해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 이와 함께 자율의 폭이 커지면 언제나 책임도 따라서 무거워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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