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정책 겉돌고 있다/구천수씨 자살 계기로 본 문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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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말만 앞선 기술지원/대기업식 영역잠식/부동산 담보요구로 대출에 어려움/고유업종·의무대출비율 “유명무실”
올해의 중소기업 대상을 받은 유망중소기업의 사장이 정부와 금융당국의 중소기업 지원제도를 비판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중소기업 정책을 새삼 돌아보게 하고 있다.
8일 자살한 한국기체공업대표 구천수씨는 유서에서 『기술·금융지원 제도의 모순성을 사회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자결한다』고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을 비판하는 한편 『정치·경제의 운영상태가 잘못됐다』며 최근 대통령선거 열기에 빠져있는 정치권의 행태를 원망했다.
한국기체공업은 충격완화 장치인 가스식 압소바의 국내개발에 성공,지난 6월 국민은행이 올해 처음 마련한 92년도 우수중소기업 대상을 받는 등 우량기업으로 꼽혀왔으나 20억원에 이르는 거액을 기술개발 투자에 쏟아부은데다 가스식 압소바가 고급차종에만 장착돼 수요개발에 한계가 있었던데 부도원인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가스식 압소바 시장의 전망이 밝자 국내 대기업이 새로 뛰어들면서 자동차회사에서 제품구매를 기피한 것도 구 사장을 애타게 했다』고 전했다.
구씨의 죽음은 무리한 기술개발투자와 대기업의 신규참여에 따른 판로부진 등 경영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정부의 중소기업정책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어서 중소기업의 현주소를 뼈아프게 돌아보는 계기가 돼야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구씨의 죽음이 알려진뒤 정부는 『한국기체공업은 병역특례업체와 기술선진화업체,유망중소기업 등으로 지정돼 중소기업 지원제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업체중의 하나』라고 밝히고 있고,실제로 이 기업이 7개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만 50여억원에 이르고 있다.
이 회사의 매출액(연간 30억원)으로 볼때 금융비용의 부담이 지나치게 많았던 셈이다. 또한 국민은행측은 『6억원의 대출중 신용대출이 5억원이나 된다』며 『한국기체공업이 부도를 낸 것은 만도기계 등 대기업이 가스식 압소바시장에 참여,경쟁이 붙은데 원인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소기업인들은 정부의 기술지원 정책이 겉만 그럴듯할뿐 알맹이가 없다고 비판하고 있으며,특히 금융기관이 기술과 신용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기 보다는 지나칠만큼 부동산담보를 요구해 중소기업의 금융기관 이용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소기업 의무대출 비율과 중소기업 고유업종 등 제도는 잘돼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효성이 문제라는 것이다.
산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최근 1천여개의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의 25.8%가 중소기업 지원제도를 이용한 적이 없다고 답했으며 이용하려 해도 기회가 없었다는 기업이 21.6%에 달해 결국 47.4%의 기업이 지원제도를 전혀 활용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모처럼 기술개발을 통해 신제품을 내놓아도 시장성이 좋으면 대기업이 뛰어들어 판로가 막히기 일쑤여서 최근 중소기업진흥공단 조사에서도 기술개발시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판로개척(24.4%),개발자금부족(21.8%) 등이 꼽혔다.
또한 대기업에 대한 것이지만 기업을 매도하는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와 대선 등에 따른 기업환경의 악화도 「기업하려는」마인드를 냉각시키고 있어 구씨의 죽음을 계기로 중소기업은 물론 전체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힘을 모아가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길진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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