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DJ에 머리 조아린 여권 대선주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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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제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6.15 남북 정상회담 7주년 기념 만찬'에 범여권 대선 주자들이 대거 몰려들어 김대중(DJ) 전 대통령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대부분 최근에 동교동 사저를 개별적으로 방문해 정치 훈수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DJ에게 합동 세배를 한 셈이다.

4년 전 새천년민주당 분당 이후 할퀴고 물어뜯던 이들도 DJ의 품 안에서는 살가워졌다. 햇볕정책 아닌 지역주의의 위력 때문이다. 만찬에서 나눈 대화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여기 앉으면 다들 대선 주자"라고 서로 치켜세우는가 하면, 야당 후보를 거론하면서 누구는 약점이 많아 낙마할 것이고, 누가 후보로 나오면 게임이 쉬워진다는 등 유치한 흠집 내기도 서슴지 않았다.

DJ는 지역감정의 피해자에서 최대의 수혜자로 변신한 지 오래다. 자신만으로 모자랐는지 아들까지 지역감정의 혜택을 입게끔 거들었다. 그는 지난해만 해도 현실정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올 들어 "단일 정당이 어려우면 단일 후보를 내면 된다" "책임지고 대통합을 이뤄라"며 노골적으로 대선 정국에 개입해 왔다. 많은 국민의 우려와 비판이 잇따르자 "시비를 각오하고 말한 것"이라고 대놓고 뻗대기도 했다.

그런 DJ가 마련한 만찬에 얼마 전 한나라당을 뛰쳐나온 인사를 포함해 여권 주자들이 구름처럼 몰렸으니 흐뭇하기는 하겠다. 7년 전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밀리에 불법 대북 송금을 한 데 대한 반성이나 북한 핵무기에 대한 우려 같은 진지한 대화가 이런 만찬에 끼어들 여지가 있을 리 없다.

대통령 자리를 꿈꾼다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최소한 지역주의에 영합하는 구태는 본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날 만찬은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가 여전히 펄펄 살아있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겠다는 대선 주자들까지 거기에 영합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결국 그들이 외치는 개혁이니 대통합이니 하는 말들은 지역주의를 감싼 포장지에 불과했다. 국민이 똑바로 눈을 뜨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