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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내각,「중립의지」는 굳어보이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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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선공무원 공명실천이 관건/타성·공명심 고리끊으면 성과기대/과거 당정인맥 작용 잘 버틸지 의문
우리 헌정사상 최초의 「중립선거내각」이 지금 고민하고 있다.
정권말기에다 한시적이라는 속성상 약체일 수 밖에 없는데도 40여년의 고질인 관권선거의 오명을 일거에 씻고 공정·공명선거의 판을 만들어내야 하는 짐을 졌기 때문이다.
공무원의 선거개입을 차단하는 것도 큰 과제이나 따가운 시선에 위축된 공무원들을 독려,행정의 공백을 막고 엄정한 선거사범단속으로 공명선거를 적극 유도해가기란 쉽지 않다.
어디까지가 일관성 있고 책임있는 행정이며 무엇이 선심행정의 한계를 넘긴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한준수 전 연기군수사건이나 서울 강남을의 안기부 흑색선전물사건 등으로 이미 「뭐묻은 꼴」이 된 정부가 누구를 나무라 선거사범단속에 적극 나설 수 있겠는가 하는 점 등이 고민거리다. 국민감정이라는 행정의 배후여건도 결코 우호적이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칫 중립내각은 문자 그대로 「중립지대」만을 표류하고 말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현승종신임총리가 한동안 완강하게 총리직 수락을 고사한 것도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그런 위험부담의 심리적 압박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현 총리와 새로 입각한 선거관련장관들이 믿는 것은 아직도 일부 정가에서 의심섞인 눈초리를 보내는 이른바 노심뿐이다. 그러나 법과 대부분의 일선공무원들이 모두 예전 그대로인데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사정이 백팔십도 달라졌다고 할 수 없고 또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물론 대통령의 민자당 탈당,중립선거내각출범,안기부·내무부·경찰청 등 각 부처의 거듭된 엄정중립지시로 전반적인 분위기가 바뀐 것만은 분명하다. 대통령은 최근 군에 그동안 의혹을 받아온 정훈교육 등을 선거전후에는 하지 말도록 특별지시했다. 이같은 사실이 새로운 분위기조성에 한몫하고 있다. 어느 고위 공무원은 최근 김중권청와대 정무수석이 대학동창모임에 참석했다가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보고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민자당 선대위원장을 맡기전에 만든 송별 저녁모임에 나가야할지 고민하고 있다.
중앙부처의 국장급에도 이미 해방이후의 신세대가 상당수 등장했다. 이들이 주축을 이룬 공무원사회가 부도덕한 지시에 맹목적으로 복종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리라고 보기도 어렵다. 한 전군수의 양심선언이 그 이하나 그 이상의 직급에 있는 모든 공무원들에게 충분한 경고가 됐다고 중앙부처의 관리들은 입을 모았다. 『보안은 없다. 극히 제한된 사람만 검토한 서류도 공개되는 형편인데 조직적 관권부정이란 상상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최근의 사태변화로 더욱 확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같은 분위기가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지방의 일선 공무원사회까지 아직 이르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9·18선언이후 정부의 내부점검에 따르면 『일부 시장·군수들은 정부의 공명선거 의지가 겉다르고 속다른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고 한 관계자는 실토하고 있다. 정부의 공명선거의지 표명으로 선거에 임하는 자신들의 입장만 더 어려워졌다는 불평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정부수립후 지금까지 우리 공무원의 체질이 행정선거에 익숙해있다는 뜻이다.
『오랜 「정부·여당」의 관계에서 형성된 인맥이 지방의 일선 공무원들을 압박해올 경우 과연 정부의 공명의지만으로 모두 버텨낼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서는 불안하다』고 말하는 장관도 있다. 어느 정당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과거의 여야개념에서 벗어나 또다른 연기군수가 돌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재로서 정부가 관권부정시비를 봉쇄할만한 뾰족한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선거를 주관하는 기관은 내각이 아니라 헌법상 독립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다. 내각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우선 공무원들의 정신교육을 강화하고 그 과정에서 부수될 대국민 홍보를 통해 선거사범의 억제 및 행정여건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경찰이나 검찰이 선거사범에 대해 가차없는 엄정한 법집행을 한다해도 일부 국민과 민주·국민당 등은 과거의 잣대로 민자당에는 유리하게 하면서 타당만 더 가혹하게 다룬다고 볼 여지는 충분히 있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일선 공무원 일부가 과거의 타성이나 오랜 인간적 관계에서 엉뚱한 짓거리를 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것을 정부차원으로 보려는 시각이 엄존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정부가 마련해 관계부처에 통보한 복무지침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정부는 그러나 복무지침을 만들면서도 고심했다고 한 관계자는 귀띔했다. 공명선거의 원칙에는 납득하면서도 구체적 실천의 문제에서 답답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 사례중심으로 만들기는 했으나 자칫 지금까지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인상을 주고 한 전군수사건 등으로 사기가 떨어진 공무원들의 반발만 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립선거내각은 그말이 뜻하는 만큼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관행과 개인적 공명심 등의 차원에서 음성적으로 이루어진 공무원의 선거개입금지를 가시화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내는데도 힘겹기만 하다. 그래서 현 내각은 끝까지 고심만 하다가 끝날 수도 있다.<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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