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중심이 없다/이각범(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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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사회가 흔들리고 있다. 정권말기면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권력누수현상의 정도를 넘어서서 사회곳곳에서 해체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남로당 이후의 최대 간첩사건이 터졌는데도 그것을 발표하는 정보기관이나 그 발표를 수용하는 국민의 태도에서 도무지 심각성을 읽을 수 없다. 그렇다고 탈냉전의 도도한 조류를 거역해 정권안보용의 반공소동을 다시 벌이자는 시대착오적 제안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국기를 흔들뻔한 대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미온적 대처방안을 내놓을뿐 누군가 명백하게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
우리의 중요한 군사기밀이 야당대표의 비서를 통해 북한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해서 야당대표가 사퇴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이미 국민에게 이와 관련해 사과한 바 있으므로 책임의 일부분은 덜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안보체계에 중요한 허점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당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솔직히 털어놓지 않고 있으며,그 발표 역시 상당한 정치적 고려를 거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이다.
단기적 정략은 무수하나 장기적 국가목표가 무엇인지는 사회지도층조차 확실하게 설정하지 못한 듯 하다.
또한 국정운영과 사회지도에 분명한 기준이나 기본원칙이 서있지 못하다.
대통령의 탈당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 역시 관권선거의 배제라는 단기적 목표를 겨냥했을뿐 책임의 방기라든가 리더십 부족증에 대해서는 변명할 수 없게 되었다.
정치가 표류하고 국가경쟁력의 쇠퇴가 예견되는 분위기 속에서 공직자의 기강은 해이해지고,몰상식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대중들의 무질서는 방관되고 있다.
오늘도 장안의 거리에서 선량한 보통사람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길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무책임·무소신만 난무
우리 사회가 중심이 없이 흔들리는 현상은 지도층의 무책임·무소신 현상 때문임이 밝혀진 이상 나라의 중심을 새로이 구하는 일이 시급하게 되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비록 지금까지의 상환전개가 대통령의 탈당에 이르기까지 소설 『최후의 계엄령』과 일치했다 하더라도 청년장교들의 새벽 도하로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대의 흐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율성과 개방성,그리고 다양성의 신장이다.
지금까지의 정치·사회지도층은 국가의 장기적 목표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조국근대화가 60년대에 위로부터 제시된 국민적 합의였다고 한다면 지금은 국제화시대를 맞아 국가의 정치력·경제력·문화력·윤리력,그리고 지력을 망라한 국가의 총경쟁력을 어떻게 세계적 수준으로 신장시킬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한 밑으로부터의 합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하자고 한 것이 민주화의 과정인데 민주주의란 구체적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지 막연한 방종과 책임회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구체적 질서의 추구와 마찬가지로 통일과 외교·행정·환경·교육·경제와 기술 등 각분야에서 구체적이고도 장기적인 정책목표를 둘러싼 국민적 합의의 도출과정이 필요하다. 장기적 정책목표에 관한 국민적 합의는 우리사회 새로운 질서의 기본원칙이 되어야 한다. 이 원칙에 의해 해서 될 일과 안될 일이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일본기업이 강한 이유는 기업의 목표를 종업원들이 알고 이를 위해 각부서에서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는 이와 반대로 잘된 결정을 위한 합의의 과정도 없었고 잘못된 행위에 대한 응징의 절차도 불투명했다.
○합리적 질서로의 개혁
나라의 중심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으면 사회 각부문의 생존과 승리를 위한 전략은 곧 나라의 발전과 직결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와 같이 나라의 중심이 상실되고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힘쓸 뿐 정책의 일관된 추진이나 조직의 기강확립에 역부족일 때에는 정략과 집단이기주의의 난무가 사회의 해체를 촉진할 뿐이다. 그렇다고 나라의 중심을 어느 개인에게 의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자율화시대의 사회적 중심은 권위주의시대 강권을 지닌 일인지배 형태와 달리 사회의 요소 요소에서 자율성과 책임성을 신장시키는 세력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
이제 정치적 고려에 의해 안보·외교·경제,혹은 문화의 결정이 이루어져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의 고려대상이라면 국가의 총체적 경쟁력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사회의 중심은 한편으로 무정부주의적 풍조에 대처해 질서와 권위를 보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율적·합리적 질서로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새로운 중심의 형성을 위한 자각된 행동들이 모여져야할 때다.<서울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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