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손으로 드럼통 든 장사|밝혀지는 옛 씨름 왕「부산 노장군」일 스모계서도 맹활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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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해방을 전후해 일본과 한국 씨름판을 풍미했던「부산 노장군」의 미망인이 억척스럽게 모은 거금을 영유아(영유아)보육사업기금으로 선뜻 내놓자 고인이 된 노장군이 씨름계에서 화제가 되고있다.
화제의 주인공 노한성 (노한성·87년 작고)씨는 부인 이필련 (이필련·64·부산시수정1동1007) 씨의 선행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 됐다.
『부산대에서 어린 자식들을 맡길 데가 없어 직장생활을 하기 어려운 저소득 맞벌이 부부와 모자가정을 위해 어린이를 돌봐줄 시설을 만든 다기에 평소 생각하던 일인데다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이씨는 지난달 26일 부산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식에 앞서 장혁표(장혁표) 총장이 찾는다기에『할머니가 학교에 다니느라 고생했다고 상을 주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 총장으로부터『종합보육센터를 건립하는데 독지가를 찾고있다』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3억1천 만원을 기탁하겠다고 약속했다.
장 총장은 보육센터 건립기금을 기탁할 사회사업가를 수소문하던 중 주변에서 최고경영자과정 제21기 최고령수료생인 이씨를 추천, 의사를 타진했던 것.
이씨는 이미 기부금출연증서를 부산대 측에 전달했고 이를 위해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는 수정동 옛 부산KBS부근 불고기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
이씨가 씨름꾼 노한성씨를 만난 것은 20세 때인 지난48년.
이씨보다 일곱 살이 많은 노씨는 경남함양군유림면에서 부유한 농가의 외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해 동네씨름판을 휩쓸었다.
노씨는 17세 때 일본에 있던 고모부의 주선으로 도일, 일본씨름인 스모에 발을 들여놓았다.
20세가 넘으면서 노씨는 키2m5cm에 몸무게 l백30kg의 거구가 되었고 스모선수로는 상위그룹인 마쿠우치에 오르기도 했으나 해방과 함께 모든 것을 뿌리치고 귀국했다.
이후 「부산 노장군」이란 별명으로 유명해진 노씨는 기름이 가득 찬 드럼을 맨손으로 들어올리는 괴력을 가진, 당시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체력 그리고 일본 스모에서 익힌 기술로 전국의 씨름판을 휩쓸고 다녔던 것.
전국의 씨름판에서는 일단 「부산 노장군 」 이 나타나기만 하면 기권사래가 속출, 몇 차례 싸우지도 않고 황소를 독차지하기 일쑤였다.
노장군은 당시엔 엄청난 거구로 승용차를 탈수도 없었고 버스를 탈 때도 허리를 굽히고 서있어야 했는가하면 3백40㎜나 되는 발에 맞는 양말과 신을 시중에서 구할 수 없어 양말은 한꺼번에 수백 켤레를 특별주문 했고 신발은 아예 발에 맞는 전용 틀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주문을 해야했다.
평생을 씨름계를 떠나지 않고 살던 노씨는 부산씨름동우회를 만들었고 85∼86년에는 한국씨름협회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지난87년 당시 66세의 노씨가 심장마비로 숨지자 일본언론에서는 「명치시대 스모선수 중 최 장수 스모선수」로 대서특필했을 정도로 장수를 누린 편인데 이 모든 것이 모두 부인 이씨의 내조 덕분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수십 마리의 황소를 탔지만 수입이 일정치 않은 데다 자질구레한 집안살림에 관심이 없던 남편과 슬하의 2남2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구멍가게·세탁소·목욕탕·빨래비누공장 등 안 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억척스레 돈을 벌어야했던 이씨지만 남편사랑만큼은 지극해 아직도 「노한성」 이라는 문패를 떼기가 서운해 그대로 달아두고 있다고.
요즘은 남편과 함께 일군 택시회사인 대호교통(부산시구서동) 등 사업체를 관리하면서 남편의 씨름사랑을 기리기 위해 89년부터 「노한성장사배 동구씨름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 부산 =강진권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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