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이택순 경찰청장이 책임져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경찰 조직의 내부 동요가 심상치 않다. 김승연 한화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 수사에 대한 경찰청의 감찰 결과가 발표된 뒤 경찰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불만의 강도가 사뭇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감찰 결과가 발표된 5월 25일을 경찰 창설 이래 최대의 수치인 '경치일(警恥日)'로 규정하는가 하면 경찰청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 발표 등 사상 초유의 '경란(警亂)' 조짐마저 보이는 상황이다.

전직 경찰총수가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이 경찰의 자괴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이유다. 최기문 전 경찰청장이 현재 자신이 고문으로 있는 기업의 총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젊음을 바쳤던 조직의 윤리를 저버리고 전방위 로비를 했다는 것은 후배 경찰들에게는 모욕이자 치욕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한때 총수로 모셨다는 게 부끄럽다"고 개탄하는 일선 경찰들의 배신감을 이해할 만하다.

현직 경찰총수도 자유롭지 못하다. 경찰의 자체 감사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역시 실망스러운 수준을 넘지 못했다. 최 전 청장이 홍영기 전 서울경찰청장과 김학배 경찰청 수사부장, 장희곤 남대문경찰서장 등 경찰 수뇌부에 전방위 로비를 하면서 이택순 경찰청장만 빠뜨렸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대목이다. 이 청장과 고교 동문인 한화 계열사의 또 다른 고문이 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는데도 경찰청 감사관실은 손도 대지 않았다. 홍 전 청장의 대화 내용 중에도 의문이 많이 남아 있는데 감사 과정에서 추궁을 포기한 흔적이 보인다. 문제가 됐던 간부 중 홍 전 청장만 자진 사퇴한 것도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 수법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경찰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축소와 은폐를 위해 전전긍긍하더니 끝내 홀로 설 수 있는 수사기관임을 입증하는 걸 스스로 포기했다. 그리고 희생양 두 명만을 검찰에 수사 의뢰하고 말았으니 "수뇌부가 자신들만 살겠다고 부하들을 팔아먹었다"는 내부 비난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경찰청이 게시판에 쉼 없이 오르고 있는 경찰청장 사퇴 요구 글을 계속 지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경찰의 숙원인 "수사권 독립은커녕 경찰 개혁이 10년 이상 후퇴했다"는 내부의 자조 섞인 목소리를 외면해선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이 청장 자신이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미 바닥에 떨어져 짓밟힌 신뢰로 어찌 10만 경찰을 통솔할 수 있겠는가. 그것만이 마지막 남은 경찰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