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에 다시 모인 6월 항쟁 주역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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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정국의 분수령이었던 6.10대회 개최장소였던 서울 광화문 대한성공회에 모였던 국민운동본부 소속 멤버들,왼쪽부터 오충일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계훈제 민통련 부의장(작고),김명윤 상임공동대표,김병오 홍보위원장,이규택 민추협 대외협력국장,송석찬 신민당 농림부장,진관스님,지선스님,박형규 상임공동대표,김현수 신민당 의원,양순직 상임공동대표. [사진=김형수 기자]

1987년 6월 10일 정오.

서울 광화문 대한성공회 대성당 종탑의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종소리는 장엄했다. 하나, 둘…마흔하나, 마흔둘. 지선스님이 당시 '민주화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지도부를 대표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당시 김명윤, 박형규 국본 상임공동대표 등 지도부 20여 명은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성공회 내 영빈관에 모였다. 선언서가 낭독되는 동안 이들은 손을 꼭 잡았다. 6월 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끈 6.10 국민대회의 시작이었다. 선언서가 낭독되던 같은 시간 서울 송파구 잠실체육관에서는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치르고 있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정국의 분수령이었던 6.10대회 개최장소였던 서울 광화문 대한성공회에 모였던 국민운동본부 소속 멤버들이 민주항쟁 20년을 맞아 20년만에 같은 자리에 처음으로 다시 모였다.참석자들이 당시 유일하게 중앙일보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며 당시를 회고 하고 있다.왼쪽부터 오충일 당시 국민운동본부 공동집행위원장(현 의문사 진상조사위원장),박형규 상임공동대표,금영균 국본 서울지부장,진관 스님,김재열 성공회 신부,송석찬 신민당 농림부장,당시 사택을 회의장으로 제공한 성공회 고 박종기 신부의 아들 박성순씨.유시춘 국본상임집행위원,김병오 전의원,김명윤,양순직 국본 상임공동대표,이규택 민추협 대외협력국장(현 한나라당 의원). [사진=김형수 기자]

20년이 지났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김명윤 상임공동대표(현 변호사) 등 지도부가 20년 만에 처음으로 22일'6월 민주화운동 성지'인 성공회 영빈관에 다시 모였다. 당시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성공회 뒷담을 넘어 들어가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도 자리를 함께했다.

40~50대의 당시 지도부는 이제 황혼의 나이에 접어들어 있었다. 웃는 모습으로 다시 만난 지도부는 감회에 젖어 당시를 회고했다.

김명윤 국본 상임공동대표는 "그해 1987년은 해방 이후 42년이 되는 해였다"며 "군사독재의 사슬을 끊고 민주주의의 새날을 열자는 뜻에서 마흔 두 번 타종을 하고 선언서를 낭독했다"고 말했다.

또 박형규 당시 국본 상임공동대표는 "군사독재정권과 싸워 사실상의 무혈혁명을 성공시켰다"며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것이 당시 국민운동본부의 목표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대회가 열리기로 예정돼 있던 성공회 주변은 경찰이 며칠 전부터 삼엄한 경비를 펴며 원천봉쇄에 들어갔다. 참석자들은 3 ̄4일 전에 미리 들어 오거나 대성당 뒤편 수녀원 담장을 넘어 왔다. 일부는 당시 성공회 주임신부가 보낸 성당 자동차에 숨어서 들어가기도 했으며 새벽기도 피아노 반주자로 가장해 들어온 참석자도 있었다. 오충일 당시 국본집행위원장(현 의문사진상조사위원장)은 대회를 앞두고 군사독재정권의 가택연금을 피하기 위해 집을 나와 동가숙 서가숙하며 지내다 대회 3일 전 미리 성당에 들어가 있었다. 대회가 끝난 후 서경원 전 의원은 청소부로 가장해 대성당을 벗어나기도 했다.

이 날 오후 6시 '6.10 국민대회'가 전국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대학생과 '넥타이부대'로 불리던 시민들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민주화의 열망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서울을 비롯해 부산.대구.광주.인천.대전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목소리와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김병오 국본 홍보위원장(현 6월 민주항쟁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우리가 과연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것도 사실"이라며 "하지만 거리에 울려퍼진 자동차의 경적소리는 군사정권의 최후를 알리는 조종소리 같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유시춘 당시 국본 상임집행위원장은 "대회가 끝난 뒤 참석자들의 대부분이 경찰에 연행돼 옥고를 치렀다"고 말했다. 또 송석찬 당시 신민당 농림부장은 "6.10 대회는 한국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이정표다"며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한 것이 민주화를 정착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20년 만에 모인 이날 참석자들은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의 무게만큼 민주화도 놀랄 만큼 진척됐다며 입을 모았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도 한결같았다. 오충일 위원장은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민주화는 이뤘지만 (이념적인)양극화가 심해졌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6.10 대회 당시 국본 참석자들은 이후 매년 6월10일이 되면 대한성공회 입구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모여 당시를 회고하고 조국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초기에는 상당수의 참석자가 옥고를 치르느라 참석자 수가 적었다.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제정구 전 의원, 계훈제 전 민통련부의장 등이 세상을 떠났다. 참석자들은 상당수 고령이 되었지만 민주화의 기틀을 다졌다는 자부심에 차 있었으며 '앞으로도 이 모임을 계속해 나가자'며 손을 맞잡았다.

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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