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도올고함(孤喊)

시대적 요청 무엇인가 김근태 만나 물어보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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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모든 인간의 말은 반드시 해석된다. 그런데 해석학에서는 그 해석에는 반드시 선이해(先理解.Pre-Understanding)가 있다고 말한다. 선이해란 쉽게 말하자면 해석의 대상을 운운하기 이전에 내가 그 대상에 대하여 이미 가지고 있는 해석의 틀이다. 이 선이해는 편견일 수도 있고 왜곡의 근원일 수도 있다. 오늘 우리 정치현실은 이 닫힌 선이해 간의 소통두절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무관심이란 선이해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12일 아침 나는 서울 쌍문동 지역구사무실에서 김근태 의원을 만났다. 동년배인 나로서는 김근태라는 이름은 외경이었다. 불의의 골리앗과 맞붙어 싸운 다윗과 같은 사나이! 지독한 고문을 버티어냈던 불굴의 사나이! 그러나 이제 그러한 파릇파릇한 도덕적 이미지와 겹치기에는 너무도 얼룩진 세월의 주름이 그를 칭칭 감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젊은 날의 초상화 속에 담긴 그 진실의 일관된 빛줄기를 나는 그에게서 발견하고 싶었다.

-김형! 도대체 당신 주장의 핵심은 무엇이오.

"나는 아무런 기득권도 주장하고 있지 않소. 시대정신의 실상을 국민에게 알리고 싶을 뿐이오. 지난 부시 행정부 6년 동안 네오콘의 발언권이 과도하게 강했소. 그러나 이제 그 발언권이 약해지면서 부시 대통령 스스로가 노무현 대통령, 김정일 위원장과 같이 3자종전선언을 하자고 발의하는 그런 분위기로 세태가 바뀌었소. 포스트노 시대에도 최소한 냉전을 신념과 철학으로 갖지 않는 정권이 들어서야 한반도에 평화가 오고 국민화합이 이루어지고 경제가 오히려 안정적으로 활성화될 수 있소. 한나라당은 아직도 국지전을 불사하겠다는 입장표명을 한 번도 취소, 사과한 적이 없소. 햇볕정책과 같은 온건한 정책을 통해 북한을 국제시장경제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것은 우리 국운의 당위요. 이를 위해선 모든 개혁세력의 대연합밖에는 다른 길이 없소."

-나가려면 나가라 하는 친노파, 우리당사수파의 기세가 등등한데 당신 주장이 씨알맹이라도 먹힐 수 있겠소.

김근태는 말한다. 씨알맹이 먹히고 안 먹히고의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주장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마지막 당위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 투명성을 높이고, 권력기관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았으며, 권위주의를 해체시키는 등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그 과정에서 당을 바보로 만들었다. 당을 묵살하는 발언을 일삼으며 당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문제, 대연정 주장, 국가보안법, 사학법 재개정, 한.미 자유무혁협정(FTA) 등,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사의(私意)에 따라 제멋대로 군림했으며, 일관된 원칙이나 철학이 부재하여 모든 건전한 개혁세력의 구심점을 상실케 만들었고, 개혁의 이념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의 프라이드를 짓밟았다. 그 나름의 원칙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나 그것은 상황적 편의에 따라 움직이는 원칙일 뿐이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논리는 사실 김근태의 논리보다 더 강렬하고 떳떳하고, 더 합리적이며 원칙적일 수 있다. 열린우리당이 잘못해 왔다면 잘못해 온 그 모습으로 정당한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지 구구한 개편이나 연합의 둔갑은 기껏해야 호남의 지역주의를 의식한 구태의연한 정치로의 복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사태를 열린우리당의 분열로 귀결되는 양비론으로 접근하면 개혁정치의 모든 성과를 자포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약점은 자기반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인기 없는 대통령의 덤터기를 뒤집어쓰기만 해온 것이 당이라면 당을 근본적으로 쇄신할 수 있는 계기를 노 대통령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요점은 기득권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것을 포기해야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FTA의 타결로 인기가 올랐다고 자만하기에는 우리당 그 자체가 본시 실체성이 박약하다는 것을 깊게 자성하고 의견대립의 폭을 좁혀가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