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이어 지켜온 ‘신라의 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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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31면

대학시절 경주의 아름다움에 홀려 사진 찍기에 몰두했던 적이 있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경주 황남빵

경주시의 중심부인 황남동 일대에 모여 있는 스물 몇 기의 신라왕가 고분과 무덤 자리들. 작은 동산만 한 크기의 부드러운 고분 능선 사이로 떨어지는 저녁 해의 인상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다.

지금은 황남동 대신 대능원 근처의 어느 곳이라 해야 더 잘 알아들을지 모른다. 그곳엔 기막히게 맛있는 빵을 굽던 허름한 가게가 있었다.

변변한 상호조차 없는 빵집은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이 집이 경주 토박이인 최영화(작고) 장인이 1939년부터 가게를 열어온 황남빵이란 사실은 훗날 알았다.
경비가 달랑거리는 가난한 대학생은 이 집의 빵을 먹으며 허기를 달래곤 했다. 윗면에 국화 문양의 장식이 찍혀 있는 빵, 아마도 신라의 기와 암막새에서 따왔을 것이다.

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달콤한 단팥 소와 온기가 가시지 않은 노릇한 빵 껍질을 깨무는 맛은 일품이었다. 있는 돈을 털어 열 개 정도 사 먹고 몇 컵의 물을 마시면 한 끼 식사의 포만감을 대신할 만했다.

세월이 흘러 황남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궁상은 벗어버렸다. 하지만 경주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콘으로 황남빵은 내게 남았다. 주전부리를 별로 하지 않는 아저씨가 황남빵 앞에선 유독 약해진다. 일부러 사람들을 몰고 가 황남빵을 맛보게 했던 경주 투어의 뒷얘기가 좋게 들리는 것을 보면 나만의 광분이 아니란 점은 분명하다.

찬란한 신라의 문화유산 어쩌고 하는 틈새엔 이런 먹거리, 즐길 거리, 체험거리가 촘촘해야 입체적 감흥으로 다가온다. 과거란 현재의 연속성이 뒷받침되어야 리얼리티를 증폭시킨다.

황남빵을 ‘신라의 맛’ 정도로 발전시켜야 하는 당위는 이 지점쯤에서 힘이 실릴지 모른다. 모두가 알고 사랑할 만한 먹거리 하나쯤 갖는 일은 풍요로움이다. 경주에 들르면 습관적으로 황남빵 한 상자를 사들고 나온다. 좋은 것은 함께 나눌 때 그 기쁨이 커지는 법이다.

황남빵이란 가게가 황남동에 있으므로 자연스레 이름 붙은 조그만 단팥 빵이다. 천안 호두과자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빵(과자)으로 자리 잡았다.

모양과 수법이 비슷한 먹거리를 하나는 과자, 다른 하나는 빵으로 부르는 혼란을 설명할 재주는 없다. 두 빵의 공통점은 단팥 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과 세월이 지나도 함량과 성분을 그대로 유지하는 신뢰감이다.

황남빵은 우리나라에선 드물게 아들이 대를 이어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70년 가까운 세월을 유지했다는 사실만으로 황남빵의 존재는 우뚝하다. 뒤늦게 경상북도 지정 명품으로 등재되고 제조 공법을 특허 받았다.

지금도 황남빵 본사에 가면 국산 팥만을 사용하고 일일이 손으로 빚어 빵을 굽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좋은 것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주역은 사용자들이다. 원조의 가치를 진심으로 인정해주는 마음이 명품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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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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