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 뜨거운 미군부대 영어과외(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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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때 서울엔 승용차에 황색 스티커를 붙여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용산의 미8군 영내 출입을 할 수 있게 하는 그 스티커 한장을 얻기 위해 졸부들은 뒷거래를 하는 추태까지도 보였다.
지난 3일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린 사진 한장은 지나간 우리의 추한 모습이 이젠 다음 세대에까지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학생·국민학생 차림의 아이들이 미군 영내의 영어회화 과외를 받기 위해 미국인 여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3일간의 끈질긴 추적으로 이뤄진 한장의 사진과 취재기사에 따른다면,미군 영내의 이러한 불법과외 학생 숫자가 1천명을 넘으리란 추산이다. 치외법권 지역을 넘나들며 영어를 배우는 어린 학생의 숫자가 이처럼 많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지만,「미군 부대에서 영어를 배운다면 친구들이 부러워해서 기분좋다」는 어린 학생들의 사고방식은 더욱 충격적이다.
아버지 세대가 황색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면서 신분의 상승을 과시했듯,그 아들·딸 세대가 이젠 미군 부대에 들어가 영어를 배우는게 자랑으로 여겨지는 한심스런 세태가 생겨나고 있다.
중·고교 6년간 열심히 영어를 배워도 미국인 앞에서 한마디 영어를 할 수 없는 영어교육이니 미국인의 생생한 영어를 어려서부터 생활화하는게 무슨 잘못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우리의 잘못된 영어교육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미국인 영어회화 교습소는 서울 어디에도 즐비하다. 그런데도 굳이 미군영내를 교육장으로 선택한데는 부모들의 잠재된 졸부의식·허위의식이 강하게 발동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뭔가 남다른 우월감을,뭔가 선택된 선민의식을 자녀에게 심어주고 싶은 부모들의 졸부의식이 자녀의 교육을 망치고 그들의 인격형성을 금가게 하고 있음을 간과한 행태다.
정규적인 교육시설을 갖추지 못한 군부대에서 영어 회화를 배운다고 학습효과가 높아질 리도 없다. 뿐더러 명백한 불법과외임을 알면서도 자녀에게 이를 강요하고,자녀는 또 이를 자랑으로 여긴다는 이 사회의 허위의식이 우리를 슬프게 할 뿐이다.
설령 이들이 미군부대에서 배운 과외영어로 기막힌 영어를 구사한들 그것이 본인과 나라 발전을 위해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외국어란 어디까지나 외국어일 뿐이다. 어려서부터 잘못된 선민의식과 우월감을 키우며 배운 외국어가 자칫 모국어화하면서 민족과 제나라를 업신여기는 천민의식으로 발전할까 걱정이다.
정당성을 굳이 따지거나 불법여부를 떠나서 올바른 자녀교육을 생각하는 부모라면 하루라도 빨리 미군부대 영어과외 같은건 중지시키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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