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뒷마당 안 된다” 유럽에 新냉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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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08면

지난 24일 유리 발루예프스키 러시아군 총참모장은 폴란드와 체코에 엄포를 놓았다. 두 나라는 미국의 미사일방어(MD·①)에 협조적이다. 미국은 폴란드에 탄도미사일 요격 미사일 10기를, 체코에 미사일 탐지 레이더를 2012년까지 배치할 계획 아래 협상 중이다. 발루예프스키는 “그런 시설들이 러시아 안보를 위협하면 우리 군의 (작전)계획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동유럽 MD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의도다. 미국은 이란의 탄도미사일로부터 나토 동맹국과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지난 1월 MD 계획을 발표했다. 폴란드와 체코는 1999년 나토에 가입한 미국의 새 안보 파트너다. 모두 이라크에 파병했다.

발루예프스키의 발언은 시점 때문에 더 주목을 끌었다. 전날 모스크바에서 미ㆍ러 국방장관 회담이 열렸기 때문이다. 동유럽 MD가 주요 의제였던 이 회담은 평행선을 그었다. 아나톨리 세르듀코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MD는 세계ㆍ지역 안보에 큰 충격을 주는 불안정 요소”라고 말했다. 반면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우리는 새 위협에 직면해 있고, 억지와 방위를 위한 새 전략을 필요로 한다”고 응수했다. 기자회견에서다. 발루예프스키는 “동유럽 MD는 안 된다”고 쐐기를 박으면서 미국의 외곽을 때린 셈이다.

미국의 동유럽 MD 계획은 미ㆍ러 간 신냉전의 불씨다. 러시아는 나토의 동방(東方) 확대(그래픽 참조)보다 더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군부까지 전면에 등장했다. 두 나라 정상들과 요인들의 발언ㆍ동선(動線)은 냉전과 별 차이가 없다. 게이츠 장관은 방러 후 폴란드와 독일에 들렀다. MD에 대한 협조를 굳히기 위해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7일 바츨라프 클라우스 체코 대통령을 모스크바로 초청했다. 군부는 으르고 대통령은 달래는 화전(和戰) 양면전술이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6월 폴란드ㆍ체코 방문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강경 입장은 미국의 전략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미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레이건 미 행정부의 미사일방어 전략인 전략방위구상(SDI)에 맞서기 위한 군비 확장이 소련 붕괴의 한 요인이었다. 러시아의 격한 대응은 ‘학습 효과’ 때문일지 모른다.

러시아 입장은 님비(NIMBYㆍ내 뒷마당은 안 된다)로 요약된다. 이웃나라가 미국의 MD에 협조하면 유럽에서의 전략 균형이 깨진다는 우려다. ‘강한 러시아’를 내건 푸틴 체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악몽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미국의 MD는) 유럽의 지정학적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꾼다”고 말했다. ‘벽에 걸린 총은 반드시 사용된다’는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MD가 공격용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러시아는 이란의 탄도미사일 능력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샤하브 탄도미사일은 사거리가 미국은 물론 서유럽에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동기를 의심하는 이유다.

미국도 요지부동이다. 러시아의 입장과 관계없이 동유럽 MD를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미국 측 논리는 요격 미사일 몇 기가 수천 개의 러시아 핵탄두를 잡을 수도 없고, 그럴 뜻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주 미국은 러시아도 참가하는 MD를 제안했다. MD 기술 공유와 레이더 정보 공유, 공동훈련이 그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10기의 요격 미사일과 몇 개의 레이더가 러시아의 전략적 억지력을 위협한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된다(purely ludicrous)”고 말했다. 26일 열린 나토 외무장관 회의를 앞두고서다.

향후 초점은 러시아의 태도다. 러시아는 유럽 안보의 초석이 된 두 개의 조약 파기를 시사하고 나섰다. 하나는 유럽재래식무기(CFE·②) 감축조약이다. 푸틴 대통령은 26일 이 조약의 유예(모라토리엄)를 언급했다. 이 조약 협상은 유럽에서의 재래식 무기를 줄여 냉전 해체의 촉매가 됐다. 다른 하나는 중거리핵전력(INF·③) 폐기조약이다. 미국의 MD 계획 발표 이후 군부가 파기 입장을 밝혔다. 미국과 소련이 유럽에 배치한 중거리 핵미사일을 폐기해 유럽에서 소련의 핵공포를 줄여준 조약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미국에 맞서 군비경쟁에 뛰어들 수 없는 여건이다. 러시아의 국방비는 미국의 5%밖에 안 된다. 러시아로선 우회전략을 쓸 수밖에 없다. 세르게이 미로노프 러시아 상원의장은 “CFE감축조약 유예는 러시아의 첫 비대칭적 대응”이라고 말했다. 다른 수단이 더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MD에 맞서기 위해 냉전기의 카드를 다시 끄집어낸 셈이다. 둘째는 이들 조약에 대한 푸틴의 반감이다. 두 조약은 소련이 무너져 내릴 때 체결됐다. 푸틴은 ‘약한 러시아’ 때의 협정을 손질하려 한다.

폴란드와 체코가 러시아의 압력을 견뎌낼지도 관심이다. 두 나라 국민의 반대 의견은 강하다. 여론조사 결과 폴란드는 반대 57%ㆍ찬성 25%(3월), 체코는 반대 68%ㆍ찬성 26%(4월)였다. 그렇다고 나토의 우산 밑으로 들어간 두 나라가 미국의 제안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두 나라가 MD 배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나라를 물색하겠다는 태도다.

미ㆍ러 간 신냉전의 전선(戰線)은 당분간 확대될 전망이다. 그것이 국제질서와 푸틴의 후계체제에 어떤 영향을 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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