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들 '이해관계'로 뭉치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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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06면

1960년대
"돈은 모아줄테니 정치 좀 잘하라"

해방 뒤 이승만 정권은 대일 교역을 수시로 중단시켰다. 대일 의존도가 높던 재계는 반발했다. 재계와 정권은 대화도 없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시장경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재계는 구심점이 절실했다.
1961년 1월 대한제분·삼양사·경방 등 50여 개의 기업이 모여 전경련의 모태인 한국경제협의회를 만든다. 기업을 키운다는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협의회는 이후 기간산업에 뛰어들기 위해 태백산종합개발계획을 발의하는 등 기업 양성이라는 목표 아래 똘똘 뭉쳤다. 비화도 많았다. 61년 3월 24일 반도호텔 888호. 장면 총리와 재계 인사 등이 만났다.
장 총리는 “나라를 구해야겠는데 길이 뭐요”라고 했다. 재계 인사는 “우리는 정치자금 거둬 줄 테니 당신들은 정치나 잘하라”고 받아쳤다.

1970년대
관치금융 우산 속 똘똘 뭉쳐 몸집 키워

기업을 키우자는 분위기는 조성됐지만 공장 지을 돈은 없었다.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는 61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외자 도입 촉진책을 건의하고 미국·유럽을 돌며 유치에 나서는 등 공동 이익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일화도 많다. 62년 2월 ‘울산공업센터’ 간판이 걸렸다. 미국 제너럴모터스·포드·다우케미컬 등에서 쟁쟁한 28명의 기업인이 김포공항에 내렸다. 재계를 포함해 일사불란하게 민·관·군 대작전이 펼쳐졌다.
미 기업인들은 보리만 30~40㎝ 자란 채 허허벌판인 울산에서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정희 정권은 60∼70년대 자동차·철강·중화학산업 등에 대한 육성법을 만들어 대그룹을 밀어줬다. 이른바 관치금융의 우산 아래 낮은 금리로 사업자금을 빌려주고, 진입장벽을 설치한 것이다. 68년 3월 회원 수가 160여 명으로 늘면서 전경련으로 명칭을 바꾼 뒤 주요 대그룹들은 더욱 똘똘 뭉쳐 몸집을 키워 갔다. 전경련은 명실상부한 재계 맏형으로서 힘을 과시했다.
70년대 초 사채 금리가 연 30~40%에 이르면서 기업들이 아사 직전에 이르자 전경련은 청와대·재무부·상공부를 돌며 살려 달라고 호소해 정부는 72년 8·3 사채동결 조치를 발동했다.

1980년대
중동 개발 붐 타고 정부의 든든한 파트너로

70, 80년대는 석유파동과 국제수지 적자, 미국의 군사비 지원 감소 등으로 한국경제와 재계가 사면초가였다. 그러나 엄청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인 중동 산유국들의 개발 붐을 타고 재계는 다시 한번 결속력을 과시했다. 마침 베트남 파병 때 건설용역 경험을 기반으로 중동에서 도약의 발판을 찾았다.
전경련은 70년대 중반 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이집트 등에 민간 경제협력 사절단을 파견해 지원사격을 했다. 정부엔 중동과 외교 확대 등을 적극 건의했다. 80년대엔 올림픽 유치를 위해 적극 뛰었고 이후 기업들의 해외 진출에 도움을 줬다. 이렇게 전경련은 파죽지세로 성장하는 한국경제의 호시절에 기대 정부의 파트너로 입지를 굳혔다.

1990년대
글로벌 경쟁 시대 독자 생존 모색 바빠

90년대 들어 ‘국경 없는 시장의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한국 재계는 80년대 후반부터 고금리·고임금과 심한 정부 규제 등으로 신음했다. 그러다 미국의 신경제 열풍과 함께 세계화 바람이 거세지면서 외풍에 부닥치게 됐다.
방패막이 역할을 해야 할 전경련은 김영삼 대통령 제의로 ‘30대 그룹 경쟁력 10% 높이기 운동’ 등을 전개했다. 고(故) 최종현 전경련 회장은 기업 경쟁력이 아닌 ‘국가 경쟁력’이라는 용어를 썼다.
93년 ‘국가경쟁력민간위원회’를 발족해 고비용·저효율 구조 타개책을 논의했다. 전경련은 이어 해외투자·공정거래·금융·노사관계법 등 100대 규제를 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기업들은 저마다 생존을 모색하기 바빴다. 전경련은 이미 재계의 구심점이 아니었다.

2000년대
외환위기 뒤 십자포화 '빅딜'등 갈등 불거져

98년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기업의 생사를 갈랐다. 정부가 기업을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했다. 칼바람 같은 군살 빼기가 진행되면서 대그룹의 이른바 ‘문어발 기업’은 하나 둘씩 잘려 나갔다. 관치금융이 수술대에 오르면서 자금 줄도 말라갔다. 공통의 이익이 줄어들면서 전경련의 위상도 약해졌다.
일부 회원사가 그룹 간 사업 빅딜 과정에서 전경련의 중재에 서운함을 품으면서 화합에 금이 가기도 했다. 전경련 산하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원은 97년 7월 ‘실패한 경영진을 퇴진시키자’는 보고서를 내놓아 파문을 일으켰다. 삼성차의 빅딜 무산에 전경련 회장인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반도체 빅딜을 하면서 전경련이 현대 손을 들어주자 발을 끊기도 했다. 이 같은 파열음으로 전경련의 결속력은 점점 쇠퇴해갈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2ㆍ3세들 경영 전면에 또 다른 변화 예고

재계 터줏대감인 각 대그룹의 오너 회장들은 이제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그 뒤로 2, 3세들이 경영권 승계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아버지 세대의 개발경제 시절처럼 끈끈하게 손잡고 도운 경험이 별로 없다.
무엇보다 외환위기 이후 대그룹의 덩치가 달라지고 사업 분야가 전문화되면서 동질감을 찾기 힘들게 됐다. 지난해 재계의 '뜨거운 감자'였던 출자총액제한제도만 해도 그룹별로 이해관계가 달랐다.
재계의 통일된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못했다. 전경련은 계속 도전을 받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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