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전후 최장의 호황 누리는 일본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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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일본 경제가 이달까지 63개월째 경기상승을 이어가고 있다. 전후(戰後) 최장 신기록이다. 앞으로도 한동안 상승 국면이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1990년대 거품 붕괴로 무기력하게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일본이 더 이상 아니다. 대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집권하면서부터다. 그는 '작은 정부'를 내세우며 공공부문을 수술했다. 우리 수도권 규제와 비슷한 공장제한법을 폐지했고,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원조 격인 주식보유총액제한제도 없앴다. 엄청난 반발을 무릅쓰고 직원 27만 명의 우정공사 민영화를 밀어붙였고, 대기업.노동 규제만 1500여 건을 풀었다.

아베 신조 총리도 고삐를 조였다. 급기야 공무원이 산하기관이나 민간에 '낙하산'으로 내려가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우리 못지않게 '관료 왕국'으로 불리던 나라다. 공무원의 철밥통과 낙하산이 수십 년간 관행이었는데, 과감히 깬 것이다. 그러면서 민간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가 지금의 호황이다. 규제가 줄면서 지난해 설비투자가 7.6%나 늘었다. 기업환경이 좋아지자 중국.동남아로 떠났던 기업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있다. 도요타자동차는 1분기에 234만 대를 팔아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80년 아성을 깨고 세계 1위에 올랐다. 그런데도 도요타 노사는 임금을 월 8000원만 올리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는 쪽을 택했다. 이참에 경쟁사를 멀찌감치 떼어놓자는 데 노사가 공감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경제가 좋아지고, 일자리가 늘 수밖에 없다. 일본 기업은 내년 봄 93만 명의 대졸자를 뽑기를 희망하는데, 대졸 예정자는 43만 명에 불과하다. 웬만한 대학 4학년생은 벌써 4~5개사의 입사통지서를 받아놓고 행복한 고민을 한다고 한다. 정년퇴직을 60세에서 65세로 늘리는 기업이 생기고, 퇴직자를 재고용하는 경우도 많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취업 빙하기'라는 말이 나돌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일자리가 생기면서 소비가 늘고, 출산율도 6년 만에 높아졌다. 5년 동안 '성장과 작은 정부'를 추진했더니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모든 게 정반대다. '복지와 큰 정부'를 이념처럼 떠받치며 지역균형과 부동산에 매달린 게 이 정부다. 민간이 먹여살려야 하는 공무원이 5만 명이나 늘었고, 다시 2011년까지 5만여 명을 더 늘린다고 한다. 제 세상을 만난 공무원은 규제를 늘리고, 정부의 입김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자리를 넘본다. 간도 크고, 염치도 없다. 이 같은 사실을 알아차린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공무원을 희망하면서 얼마 전 9급 공무원 2888명을 뽑는 데 18만6478명이 몰렸다.

반면 규제와 세금에 짓눌린 민간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기업은 해외로 떠난다. 1분기 제조업 생산은 4년 만에 마이너스 성장(-0.8%)을 기록했다. 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올해 대졸자 채용이 지난해보다 30% 줄어들 전망이다. 일본은 일자리가 남아돌고 65세까지 일한다는데, 우리는 취업 준비생이 53만 명이고 사오정(45세 정년) 신세라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극명하게 갈린 양국의 상황은 지도자와 그의 정책이 국운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본의 성공 사례에서 답은 나와 있다. 지금이라도 정책을 바로잡지 않으면 정권과 그 밑에서 코드 맞추기에 급급했던 비겁한 관료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혹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타결했다고 모든 잘못이 덮어질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국민을 더 이상 서글픈 신세로 내몰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