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말증상의 가속화를 경계한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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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갈 길은 멀고 험난한데 시간은 촉박하다.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떠맡고 해결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지만 남은 임기는 11개월밖에 없다. 막상 5월 전당대회에서 집권당의 차기 대통령후보가 결정된다면 현임 대통령의 위상과 권한은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총선패배를 둘러싼 민자당 내부의 갈등과 진통이 노·김회동으로 일견 해소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은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만 수면밑의 갈등과 내분이 언제 어떻게 치솟을지 집권여당을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은 아직 불안하기만 하다. 관가는 여소에 기죽어 보신에 급급하고 야대의 정권향방에 눈치보며 일손을 놓고,정권 교체기의 「한탕주의」가 은밀히 진행될 소지가 있다. 여기에 경제계는 재벌 총수의 국회진출에 몸사리며 꼬리를 빼고있는 인상이다.
이틈에 물가는 오르고 산업현장은 일손을 놓은채 그나마 열기를 보이던 일 더하기 운동도 퇴색해 버리고 중소기업은 연일 도산의 위기를 맞고 있다. 다시 대학가는 등록금 투쟁과 군부재자투표 반대운동으로 면학의 분위기를 잃어가고 있다.
대통령의 잔여 임기 11개월이면 자연스레 임기말적 현상이 생기게 마련인데 심각한 총선 후유증까지 겹친다면 국정운영의 장래가 어떠할지,나라 살림이 어디로 표류할지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우리 모두 임기말에 겹친 총선 후유증으로 말미암은 정치공백·행정부재·경제침체,그리고 공직사회의 부정부패와 치안부재를 미리 경계해야만 하겠다.
노태우 대통령 스스로 시사했듯 총선에 대한 모든 인과관계는 어느 누구도 아닌 대통령이 수용하고 국정 대소사를 정면으로 맞아 적극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잔여임기를 마무리짓는데 전념하기를 강력히 권한다.
1년도 채 못되는 잔여임기는 허송하기엔 긴 세월이겠지만 열심히 일하기엔 짧은 기간이다.
이 짧은 기간을 대통령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정국을 유도하고 행정력을 결속시키며 경제회복을 위해 노력하느냐가 6공정치 전체를 판가름하는 중차대한 분기점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주시하고 있다. 임기후를 걱정할 일이 아니라 남은 임기를 대통령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주도했느냐에 따라 평가의 기준은 달라지는 법이다.
임기말의 권력누수현상에 겹쳐 총선에서의 집권당 패배 자체가 대통령의 힘을 이중 삼중으로 무력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가속화될 권력누수현상을 막고 중심을 바로 잡는 일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오로지 노대통령 한사람에게 달려있다.
대통령 스스로가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고 다잡아 나가야 할 것인가,이점이 바로 향후의 민생과 경제를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판가름한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뿐만 아니라 집권당의 총선패배를 전화위복의 전기로 맞는 일도 이 길밖에 달리 없는 것이다.
대통령의 무력화는 공직사회의 무사안일을 부채질할 것이고,부정부패를 만연시킬 것이며,불법과 편법처리가 무성해지면서 이 사회는 다시 한번 더 혼돈과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소야대의 총선 결과가 결코 대통령의 무력화로 이어지는 등식이어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이 등식이 성립되지 않게끔 하기위해서도 대통령은 지금까지의 모호한 관망적 입장에서 벗어나 혼미한 정국을 가시정국으로 바꾸는 분명하면서도 단호한 자세를 지속적으로 보여야 한다.
모든 공직자들을 무사안일에서 벗어나게끔 대통령이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까지를 챙기고 단속하며 이끌고 간다는 견고한 입장 천명과 함께 과감한 실천력이 행사되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중심이 잡히고 힘이 모이게 될 것이다.
공직자들은 이제 정치판의 시녀가 아닌 테크너크랫으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를 살려야 한다. 제 자리에서 제 일을 처리함에 결코 소홀함이 없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경제인들은 더이상 정권의 향방에 눈치볼 일이 아니라 기업가 본래의 정신과 자세를 되찾아 경제난국을 타개하는 지혜와 힘을 결집시켜야 한다.
대통령의 잔여임기 1년이라는 숫자는 대통령 한사람의 개인사에 기록될 1년이 아니다. 민족사 전체의 명운을 판가름하는 1년이라는 심기일전의 비장한 상황 인식이 대통령에서부터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확산되고 심화되기를 우리는 엄숙히 촉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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