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기술 존중 문화 있어야 이공계가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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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우리 이공계 대학생의 절반이 전공 변경을 고려하고 있고, 석.박사 등 올라갈수록 더욱 심하다고 한다. 이공계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의사.공무원.변리사다. 한동대가 세칭 명문대라는 대학들의 이공계 학부.대학원생 804명을 조사한 결과다.

이공계가 위기란 말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미래를 짊어질 이공계 학생들의 절반이 딴 길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학생들은 이공계 출신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낮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우리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선배들이 사회적.경제적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포스텍을 수석입학.졸업한 여학생이 서울대 의대에 편입해 큰 충격을 줬다. 이 여학생은 박사가 돼도 미래를 걱정해야 하고, 기업에선 진급하기 힘들어 일찌감치 백수가 될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이공계 현실을 꼬집었다.

어느 국가든 이공계 기술은 국가 경제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기술력은 정부가 단지 돈을 쏟아붓는다고 일궈지지 않는다. 기술.기술자를 존중하고, 우대하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 일본.독일이 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후 급속히 재기해 경제대국이 된 것은 어느 분야든 으뜸가는 기술자면 '장인(匠人)', '마이스터'로 대우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비약적 경제발전 뒤에는 후진타오 주석 등 고위 공직자의 상당수가 이공계 출신이라는 배경도 깔려있다.

반면 우리에게는 역사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학문을 중시하고, 실용 학문을 낮게 보는 풍토가 뿌리 깊었다. 이런 문화가 지금도 사회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이공계는 기술 분야에서만 일해야 한다는 그릇된 인식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선 현장 경험이 풍부하고 우수한 이공계 직원은 새로 교육시켜 경영을 맡기는 일이 많다. 우리 기업에선 이런 일이 드물다. 고위 공직도 비이공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풍토 속에서 이공계 출신들이 스스로를 '공돌이'라 비하하고, 이공계 학생들이 의대나 자격증 시험에 몰리는 것을 어떻게 탓만 할 수 있겠는가. 부동산.주식 등으로 떼돈을 벌자는 생각이 만연한 터에 묵묵히 연구하고 기술을 닦으려는 학생들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우리 고교 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진학률이다. 실업고 출신들도 많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학력병 때문이다. 학력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열심히 일하고 나름의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대접받는 사회 문화, 기업 조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올 들어 '샌드위치 코리아'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우리가 일본.중국에 끼여 난파할 것이란 우려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기술.기술자를 존중하고 우대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도 이공계 인재 육성 정책을 펴고 있지만 부족하다. 오히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실업고 학생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부추겨 의욕을 잃게 하지 않았는가를 반성해야 한다. 실업계고의 명칭을 전문계고로 바꿨지만, 정답은 아니다. 실질적인 지원책을 세우고 대학 교육과정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 국민소득 3만 달러, 4만 달러 시대에도 기술은 이 나라를 이끌고 나갈 기본 자산이다. 이제 사회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이공계를 살릴 방안을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