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개편과 일본의 역할(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바람직한 전환기라고 하지만 국제질서는 아직 불안정한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 이런 유동적인 상황에서 그동안 평화를 지탱해 주던 양극체제를 대체하며 새로운 질서의 구심점으로 유엔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부각되어 왔다.
얼마전 유엔안보리 이사국들의 정상회담이 처음으로 열렸던 것은 그런 맥락에서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받아온 유엔의 역할을 시대상황에 따다 재설정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상회담의 결과 앞으로 『유엔이 중심역할을 맡아 나가는 동시에 유엔의 효율성과 권한이 강화돼야 한다』고 공동성명에서 밝힌데 대해 공감하는 의견이 많으리라고 믿는다. 물론 그밖에 집단안보의 필요성,군축가속화의 필요성,예방외교를 위한 유엔의 역할 등 공동성명에서 밝힌 내용들 역시 제대로 실행되기를 모두가 희망하는 것 들이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한 것은 모두가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며 새로운 국제적 협력을 이구동성으로 말하면서도 한가지 면에서는 옛날과 똑같이 변함없이 이 정상회담의 저류에 깔려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자기네 국가이익,국가적 역할만을 확대해 나가야겠다는 생각들이다.
정상회담 모임 자체가 상임이사국 5개국을 포함하여 15개 국가지도자들의 제한적인 모임이었고 전체의 의사에 따라 소집된 것도 아니었다. 상임이사국으로서 우연히 의장국이었던 영국의 발의에 따라 갖게 된 모임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의제 자체에는 올라 있지 않았지만 몇몇 국가는 유엔안보리체제의 개편문제에 더욱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유엔에서 배타적으로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안보리 상임이사국 대열에 끼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국가들이 가져온 관심이었다.
이처럼 안보리체제 개편에 가장 적극적이고 관심을 보여온 나라가 일본이었다.
특히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겠다는 구상은 비공식이라는 편법을 통해 여러차례 밖에 알리곤 해왔다. 이번 안보리 정상회담에 참석한 일본 총리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유엔헌장의 이른바 「구적국」조항의 삭제등 개정 필요성을 말함으로써 우회적으로 그 길을 마련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처럼 일본이 그 능력과 덩치에 맞게 국제사회에 기여하며 책임을 맡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일본의 의도를 경계와 불안한 눈초리로 보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일본사람들이 아직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채 지난날 이웃 나라들에 끼친 과오를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영향력 확대에 몰두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정치적 역할까지 떠맡으려면 일본은 역사에 대한 참다운 인식을 하고 있음을 모두 인정하는 바탕이 있어야 된다고 믿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