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행·저지」 구습 버릴때 됐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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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년 정기국회도 예외없이 여야의 가면극이 판을 치고 있는 느낌이다. 여당은 야당을 설득하는 채 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다수의 힘으로 일방통과를 강행한다. 반대로 야당은 실력저지를 앞세워 반대의 명분을 부각시킨뒤 일정몫의 잇속을 챙기고 「불가항력」이란 장막뒤로 사라져버린다.
이같은 유형의 징치쇼는 조금도 곡목을 바꾸지 않은 채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이 때문에 크게는 나라의 예산이,작게는 각종 법안이 이권 또는 명분의 볼모가 되어 왜곡 처리되고 있다.
오히려 금년 정기국회는 내년의 4대 선거를 앞둔 탓인지 정당과 의원들의 속물적 이해다툼이 더 노골적이고 원칙과 절제없이 벌어지고 있는 듯 하다.
정치쟁점을 다루는 여야 협상은 웬만한 국민이면 모두 알아차릴 속보이는 흥정을 주고 받고 있으며,각종 법안심의에는 로비 의혹이 여기저기서 물씬 풍기고 있다. 춤추는 회의에 흔들리는 국회의 모습은 경제침체에 위축되어 있는 국민의 마음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한다.
정녕 우리 국회,우리 정치는 이런 수준에 묶여 있어야만 하는가. 소위 변칙 통과의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는 25일 문공위의 종합유선방송법안 처리과정을 보자. 여야는 구체적 쟁점의 진지한 검증없이 지금까지 이 법이 차기대통령선거에서 이용될 가능성을 놓고 지리한 입씨름을 해왔다.
여당은 일방통과를 전제한 명분축적에,야당은 정치공세에 치중해 오다가 25일 지도부의 지시가 떨어지자 민자당은 단 1분만에 전격 처리했다. 민주당은 여당의 일방처리 기미를 다 알고도 회의에 불참,최소한 동조하지 않았다는 흔적을 남겼다. 이 얼마나 낯뜨거운 짓들인가.
소리의 깅도에 다소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와 같은 수순을 밟아 처리할 법안이 국회의원선거법,정치자금법,제주개발법등 여러개 있다. 변칙과 실력저항이란 판에 박은 삼류극이 몇번 더 벌어질 것이란 얘기다.
여당은 변칙 불가피의 이유로 야당의 비현실적이고 무리한 주장과 요구를 든다. 반면 야당은 여당의 논리와 관철목표가 철저히 강자일변도임을 비난한다. 양측의 의견엔 나름의 일리가 있다.
그러나 양측의 의식저변엔 도저히 자유민주주의를 하기엔 적합치 않은 퇴영적 기질이 도사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수의 준중,소수의 보호」라는 원칙에 접근하려는 노력없이 자기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즉각 네탓만 하는 풍토에서는 건전한 의회주의가 성장하기 어렵다.
보도에 의하면 당면 최대 현안인 국회의원선거법 개정안도 여야가 선거구를 늘리자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해 놓고 통과모양만 이리저리 재고 있는 모양이다. 돈 안드는 선거,정치참여의 기회균등,선거운동 방법의 합리적 개선등 당초 내걸었던 거창한 명분들이 여야의 야합에 의해 경시될 것이 분명하다.
속셈이 컴컴한 정치판의 거래방식이 국회와 정치에 환멸을 가중시키는 것은 스스로의 설 땅을 좁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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