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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서울 물가 - 삶의 질, 참을 수 없는 괴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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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물가가 높은 만큼 삶의 질도 높다면 참을 수 있다. 쾌적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비용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서울의 현실은 어떤가. 미국의 국제적 컨설팅 업체인 머서 휴먼 리서치 컨설팅(MHRC)이 지난해 발표한 '2006년 세계 주요 도시 삶의 질 평가'에 따르면 서울은 전 세계 215개 도시 가운데 89위다. 정치적 안정성.범죄율.외환규제.의료서비스.대기오염.교통혼잡도.문화시설.식당.기후 등 39개 항목에 걸쳐 평가한 결과다.

EIU 조사에서 서울보다 생활비가 많이 드는 것으로 나타난 10개 도시는 한결같이 MHRC 조사에서 상위권에 랭크돼 있다. 물가 수준에 비례해 삶의 질도 높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물가는 턱없이 높으면서 삶의 질은 형편없이 낮은 도시가 서울이다. 도시 경쟁력이 그만큼 뒤처진다는 소리다. 서울이 세계적인 국제도시가 못 되는 이유다.

세계를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외국 기업들 입장에서 서울은 매력적인 도시가 아니다. 홍콩이나 싱가포르보다 삶의 질은 한참 떨어지면서 물가는 오히려 높다. 중국의 상하이와 삶의 질은 별 차이가 없으면서 물가는 훨씬 높다. 도쿄나 오사카의 삶의 질과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그뿐인가. 서울에는 세계적 수준의 국제학교가 없다. 자녀 교육을 생각한다면 서울은 결코 선택 대상이 될 수 없다. 세계적 대도시 중에서 서울처럼 외국인이 의사소통에 불편을 느끼는 도시도 드물다. 부동산 값은 웬만한 선진국보다 비싸다. 중국처럼 광대한 시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투자 진출 적격지로 서울을 택하겠는가.

관광객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가 보더라도 입이 쩍 벌어질 만한 명물이나 랜드마크가 있길 한가, 이벤트가 있는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오르세 미술관, 런던의 대영박물관 같은 매력적인 문화공간도 없다. 시민들의 의식이나 에티켓 수준은 아직도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거리가 멀다. 외국인 관광객들 입장에서 감동을 느낄 만한 요소가 별로 없는 대도시가 서울이다.

국경 없는 무한 경쟁시대를 맞아 세계적 대도시들 간의 서비스 경쟁이 치열하다. 수준 높은 공공서비스와 높은 삶의 질을 제공함으로써 사람과 돈과 기술을 계속해 끌어들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됐다. 수준 낮은 서비스에 비싼 대가를 치를 사람은 이제 없다. 서울 수준의 도시 경쟁력으로는 외국인 두뇌와 외국자본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젠 서울 시민들도 참지 못한다. 이미 기업들은 중국으로, 베트남으로 줄지어 빠져나갔다. 교육 서비스에 불만인 사람들의 엑소더스로 세계 곳곳엔 한국인들의 교육 난민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국내 관광.레저 서비스 수준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밖으로 나가 신용카드를 긁어대고 있다. 유학경비와 여행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지만 애국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그 실마리는 규제 완화와 민영화에서 찾아야 한다. 정부나 서울시가 직접 관리하고 규제하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웬만한 것은 다 민간에 맡겨야 한다. 민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최대로 발휘되고, 치열한 경쟁체제가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물가는 세계 최고 수준이면서 삶의 질은 형편없이 낮은 이 참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시민들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날이 멀지 않았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