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학자들 새 활로 찾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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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좌파로 분류되는 지식인들이 독자적인 대학원을 설립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좌파 학자 40여 명으로 구성된 '사회과학대학원추진위원회'(추진위)는 5일 "변화하는 시대에 적합한 새 이론과 정책을 뒷받침할 진보 진영의 전문 연구기관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가칭 '사회과학대학원'은 2008~2009년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진보 진영의 각성 필요"=사회과학대학원 설립에는 오세철(64.전 연세대 경영대), 김수행(65.서울대 경제), 김세균(60.서울대 정치), 강내희(56.중앙대 영문) 교수 등 대표적인 좌파 학자들이 참여한다. 이들 교수들은 국내외 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했다. 추진위에는 사회주의 관련 석.박사급 연구자들과 노동 관련 연구소.사회과학 출판사 관계자들이 합류했다.

설립을 주도하는 오 전 교수는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적용 방식과 대안이 필요하다"며 "유럽의 신좌파들도 관료화된 현실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활동 영역을 노동과 정치를 넘어 여성.환경 등으로 넓혀가는 것이 대세"라고 말했다.

홍선길 사회실천연구소 연구위원은 "민족주의적 감수성에 호소하면서 지나친 친북 노선을 걷는 민주노동당을 추진위원들 다수가 비판한다"고 말했다.

조합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대기업 노조도 비판 대상이다. 김수행 교수는 "현장 운동가들 다수가 20~30년 전의 이론에 머물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좌파 연구의 위기감도 대학원 설립의 주요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대학가를 '점령'했던 좌파 연구는 현재는 소수 연구자로 명맥만 이어가는 실정이다.

◆'한국의 파리8대학' 목표=추진위는 우선 전문 연구인력을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을 만드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장기적으론 진보 진영에 정책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싱크탱크'가 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추진위는 대학원 설립에 앞서 예비 수강생을 대상으로 12일부터 3~4개월 일정으로 공개 세미나를 시작한다. 세미나는 역사.심리.문학.경제.노동 등 5개 주제로 열린다.

추진위에 합류한 학자들은 68년 프랑스 학생운동 직후 탄생한 파리8대학(프랑스), 브레멘 대학(독일)과 1차대전 직후 문을 연 뉴스쿨대(미국 뉴욕)를 모델로 삼고 있다. 이들 대학은 설립 초기 좌파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노동자들에게 문호를 확대하는 정책을 폈다. 오 전 교수는 "현장 운동가에겐 재교육 기회를, 후속 연구자에겐 체계적인 교육이 가능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정 확보가 관건=교육부 규정에 따르면 학부 없는 대학원을 설립하려면 ▶학교 소유 수익자산 40억원 이상▶학생 정원 200명 이상(학기 기준 50명 이상)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또 최소 726평 이상의 건물과 건물이 들어갈 학교법인 소유의 부지도 필요하다.

추진위 관계자는 "재원 마련을 위해 모금 운동을 진행할 계획"이라며 "추진위원 등이 공동 출자로 조합을 구성해 해결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천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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