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의펜화기행] 파묻힌 성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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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의 동대문,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서울의 성문 중 동대문이라 부르는 흥인문(興仁門)에만 옹성(甕城)을 두른 이유를 아십니까? 조선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고 2년 뒤 성곽을 쌓습니다. 성벽은 주산인 북악산(높이 342m) 능선을 따라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의 남산(265m)으로 이어지는데 동쪽의 낙산(125m)이 가장 낮습니다. 그 낙산 끝자락에 세운 흥인문 자리는 넓은 평지여서 적의 공격에 취약한 곳입니다. 그래서 성문 앞에 반원형 옹성을 둘러쌓아 성문으로 들어오려는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현재의 동대문.

그러나 이 흥인문은 임진왜란 때 전투 한번 못해보고 왜군에게 제일 처음 함락되는 치욕을 겪습니다. 제일 먼저 흥인문 앞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철옹성으로 보이는 흥인문에 겁을 먹고 선뜻 입성을 못합니다. 병사들이 모두 도망가 활짝 열린 문 안쪽엔 아무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함정일까 우려해 여러 차례 정탐꾼을 들여보낸 후에야 진입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췄다 해도 사람의 의지가 부족하면 무용지물입니다.

흥인문 자리는 습지대여서 생나무를 박고 장대석(사각형의 긴 돌)을 우물 정(井)자 형태로 여러 겹 쌓은 위에 지었습니다. 그러나 육중한 무게로 건물이 기울어 고종 6년(1869) 새로 짓습니다. 그래서 1398년에 지은 국보 제1호인 숭례문보다 나이가 390살이나 적습니다. 이 때문에 숭례문보다 격이 낮은 보물 제1호가 됐습니다. 흥인문의 부재들은 숭례문에 비해 화려하나 나약해 보입니다. 국력이 약해지면 장인의 솜씨에도 힘이 빠지나 봅니다.

펜화로 담은 흥인문은 1880년께 모습입니다. 그림 속 성벽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 보일 것입니다. 도로 포장 등을 하면서 흥인문이 어른 키만큼이나 땅속에 묻혔기 때문입니다. 2006년 실측 때 지표면 1.66m 아래에서 성문 바닥에 깔았던 박석이 발견된 것이 이를 입증합니다.

김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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