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9) 경성야화-제86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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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935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해야 할 것에 총독부에서 각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이 있다.
1935년 9월에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전 조선학교에 신사를 꼭 참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해 11월에 열린 평안남도의 도내 중·고등학교장 회의에서 그리스도교 계통의 학교 교장들은 일제히 자기네들은 신앙관계로 신사를 참배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6년에는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숭실여학교가 실제로 신사를 참배하지 않자 두 학교 교장인 매큔과 스누크의 교장직 인가를 취소하였다.
신사참배문제를 둘러싸고 그리스도교 계통의 학교와 총독부 사이의 알력은 점점 커졌다.
1937년 9월에는 광주의 숭일여학교·수피아 여학교와 목포의 정명·영흥 여학교가, 다음 달에는 순천의 매산여학교·담양의 광덕여학교가 폐교되었다.
1938년 4월에는 평양의 숭실·숭의학교가 폐쇄되었고, 평양신학교에서는 교수와 학생 7명이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는 등 총독부와 미국인이 설립한 그리스도교 계통 학교와의 충돌이 심각해져 갔다.
일본은 만주 큰 땅덩어리를 먹고, 그래도 부족해서 중국 전토를 향해 전쟁을 확대시키려고 1937년 6월에 군부의 꼭두각시인 고노에(근위)내각을 성립시켰다.
고노에는 경망한 귀족으로 이 사람 때문에 일본이 패망의 길로 달음질치게 되었다.
1937년에 들어서는 백백교라는 날 도깨비가 나타나 민심을 놀라게 하고 우리 민족의 품위를 크게 손상시켰다.
사건의 발단인즉, 1937년 2월 16일에 서울 왕십리에 사는 유인호의 집에서 백백교 교주 전용해가 술을 마시다가 주인 유인호의 아들 유곤룡과 싸움이 붙어 교주가 유곤룡을 죽이겠다고 칼질을 한데서 시작된다.
유인호는 백백교에 미쳐 전 재산뿐 아니라 딸까지 교주의 첩으로 바쳤는데 이것에 불만을 품은 아들이 교주한테 덤벼들어 백백교가 사교임을 폭로하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유곤룡이 동네 파출소에 달려가서 이 사실을 고발함으로써 놀라운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평북 영변에서 출생한 전정운이라는 자는 금강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았다고 하여 백도교를 세우고 「백백백의의의적적적」이란 주문을 외우면 무병 장수하여 신선이 된다고 설교하고 다녔다.
주로 강원도 산골에서 우매한 민중을 상대로 포교하여 세력이 커지자 많은 돈을 헌성금이란 명목으로 빼앗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강원도 금화에서 관헌에게 잡혀 백도교는 깨져버렸다.
그 아들 전용해는 이것에 맛을 들여서 다시 백백교라고 교명을 고치고 경기도 가평·양평을 근거지로 하여 포교하고 우매한 농민을 상대로 많은 돈을 빼앗고 신도의 딸을 첩으로 삼아 질탕한 생활을 하였다.
만일 신도 중에 의혹을 품은 사람이 생기면 벽력사란 놈을 시켜 산 속으로 기도하러 간다고 유인해 타살해 버려서 이렇게 죽은 남녀들 시체가 각처에서 2백여 구가 발굴되었다.
교주 외에 소위 간부란 사람들 20여명이 교주의 손발이 되어 돈 뺏기와 부녀자 능욕, 그리고 살인등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러왔다.
이런 생지옥이 벌어진 것을 까맣게 몰랐었고 더구나 서울 한복판인 왕십리의 이런 마굴에서 버젓이 갖은 짓을 다 하고 있었다는 것은 문화민족의 큰 치욕이고 불명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한때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되었던 백백교의 진상인데, 지금도 그때 우매한 민족이라고 지탄을 받던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각설하고, 1937년 7월 7일에 일본군대가 북경근방인 노구교 근처에서 무력을 시위하기 위하여 밤에 전투훈련을 했다. 도중에 사병 한 사람이 실종된 것을 갖고 중국 군이 살해하였다고 생트집을 잡아 그 부근의 중국 군에 포격을 퍼붓고 일대를 점령해버렸다.
중국 군은 굴욕을 참고 노구교 일대에서 철병하였으나, 일본측은 이는 중국 측의 계획적인 무력 항일이므로 중대한 결의를 하겠다고 언명한 뒤에 관동군과 조선군을 북 중국으로 속속 파견하였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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