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칼럼

'진보'는 독점될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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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치시장에서 진보를 독점한 정파는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정적에게 퇴행과 수구의 음험한 이미지를 덧씌워 언변과 행동의 입지를 좁힐 수 있기 때문인데, 지난 20년 동안 민주화 세력은 이런 정치적 프리미엄을 충분히 누렸다. 다른 정파들은 인권.평화.생태.평등을 앞세운 진보 진영의 기세에 주눅 들어 진보의 상징들과 사소한 연고라도 맺고자 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어지간히 정착된 현 시점에서 그것은 온당한 정치행태가 아니다.

독재시절을 저만치 멀리 두고, 이제는 산업화 세력도 민주화 세력도 모두 '비교적 진보적'이라고 할 가치영역으로 진입했으며, 급진파.자유파.보수파 할 것 없이 자아실현과 공공성 등의 진보적 가치관을 두고 경합하고 있다. 다만 기대지평과 실행방식에서 차이가 날 뿐 어느 정파도 그것을 정면으로 거부하지 못한다. 진보의 궁극적 목적이 사회 성원의 행복과 복지 증진에 있다면, 그것을 달성하는 정파야말로 진보적이다. 평균적 민의를 등지고, 업적 빈곤에 시달리는 정파는 급진적일 수는 있으나 진보적은 아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까지 가세한 '위기의 진보' 논쟁을 접하면서 들었던 일차적 의문이 이것이다. 왜 유독 그들만 진보임을 자임하는가? 대통령을 포함해 논쟁에 가담한 지식인들은 마치 국민적 동의를 얻은 듯이 자신들을 진보 진영으로 호명하는데, 1987년 이전의 경험적 결속체에 부여된 이름을 20년씩이나 연장하는 특권은 누가 인정했는가? 더욱이 그들을 진보로 격상시킨 산업화 세대의 주역들이 거의 환갑에 달해 퇴장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인구의 70%가 진보 세대, 즉 민주화 세대이거나 후속 세대로 구성된 현 시점에서 과거의 '진보 집단'을 애써 구획하는 인식구조는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노 대통령을 포함해 진보 지식인들이 '급진적 사회혁명'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면, 필자는 그들을 '구(舊)진보'라고 묶어 두고 싶다.

이 논쟁을 이끄는 진보 지식인들은 예외 없이 신자유주의를 망국병으로 탄핵한다. 이들의 주장대로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와 경제를 결딴내는 것이라면, 세계화의 대세를 외면하고 잘 살아갈 묘안은 있는가? 또 양극화와 빈곤 확대의 책임이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굴복한 노 정권의 배신 때문인가, 아니면 노 대통령이 자주 거론하는 '수구세력'의 철저한 거부와 방해공작 때문인가? 그 어느 것도 답은 아닌데,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를 '실패한 진보'로 따로 떼어 내고 '진정한 진보'의 부활을 논하는 논쟁자들이 못내 섭섭했던지 '청와대 브리핑'에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유연한 진보'가 돼 줄 것을 호소했다. 이건 또 무언가? 울뚝불뚝했던 참여정부의 정책을 유연한 것으로 봐달라는 뜻이고, 현실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해냈음을 인정해 달라는 하소연이었다. 그러나 그를 이미 제명한 진보 지식인들의 처방은 실로 급진적이었다. 미몽에 갇힌 민중을 일깨워 '대중적 분노'를 촉발할 사회운동이 절실하다거나(조희연 교수), 시민사회의 재급진화를 기획해 세력관계를 전복해야 한다는 주문(손호철 교수)이었다. 그런데 이런 처방은 진보적인가? 생존법칙이 확연히 달라진 이 시대에 이 처방은 행복과 복지를 증진해 준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가?

이 논쟁의 출발점인 최장집 교수의 진단은 이들과 달리 냉정하고 시사적이다. 민주정치의 생명인 대변과 책임기능에 충실하지 못한 정권은 진보든 보수든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다. 내 방식대로 표현하면 정당정치의 파산, 특정 분파의 과잉 대변, 업적 빈곤이라는 3대 악재를 초래한 노 정권은 진보를 말할 자원이 고갈되었다. 진보 지식인들의 급진적 대안들이 평균적 민의조차 거스른다면, 그들도 진보적일 수 없다. 이 시대에 진보는 과정적 가치와 결과적 업적을 두고 경합할 대상이지 누구의 독점물이 아닌 것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