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남편생활백서] 벼락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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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멍청하다. 그러나 "생일선물 필요 없다"는 아내의 말을 그대로 믿고 선물을 준비하지 않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아내 생일을 그저 아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아내의 생일은 남편이 평가받는 날이다. 평소 잘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날 잘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한마디로 남편이 시험에 드는 날이다. 그러니 벼락치기라도 해야 한다.

나는 업무시간이 끝나자마자 벼락 같이 백화점으로 달려간다. 아내가 귀고리 이야기하는 것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액세서리 코너 앞에서 멈춰 선다. 우유부단한 내가 선뜻 고르지 못하고 계속 망설이자 판매원이 다가온다. 판매원의 질문에 따라 나는 아내의 나이와 애매모호한 취향과 모순적인 스타일을 설명한다.

판매원이 몇 개를 추천했지만 나는 좀체 결정하지 못한다. 아내의 얼굴형과 얼굴색 그리고 머리 스타일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나는 시계를 본다. 여덟 시다. "여기 몇 시에 닫죠?" "여덟 시 반까지는 영업을 합니다만."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는다. 휴대전화가 진동한다. 아내다. "안 오고 뭐해?"

아내에게 오늘 일찍 들어오라고 해놓고는 정작 내가 늦게 생겼다. 백화점이 문을 닫기 직전 마침내 나는 하나를 고른다. 가격을 보니 생각보다 싸다. 그러나 아내가 그러지 않았던가. 가격이나 브랜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내 생일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선물이란 게 꼭 비싸다고 좋은 게 아니잖아. 2000원짜리 양말 한 켤레를 사도 선물받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손수 내가 고른다면 그게 가치가 있는 거지. 안 그래요?"

전철을 타고 나서야 나는 케이크를 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과점에는 케이크를 사기 위해 줄 선 사람들로 붐빈다. 우유부단한 나는 케이크 역시 쉽게 고르지 못한다. 내가 마음 속으로 고르면 다른 사람이 먼저 주문한다. 휴대전화 속에서는 아내가 계속 진동한다. 나는 겨우 케이크를 산다.

늦은 밤 가족들은 밥도 못 먹고 식탁에 앉아 남편과 아빠를 기다린다. 아내는 집에 들어서는 남편에게 화를 내려다 선물과 케이크를 보고는 간신히 참는다.

나는 큰 초 네 개와 작은 초 다섯 개를 꽂은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아이들과 함께 축하 노래를 부른다. 아내가 선물 포장을 푼다.

"이 브랜드 애들이나 하는 거잖아." / "아직 어려."

"그래도 그렇지. 이런 걸 나더러 하라고?" / "어때? 잘 어울리는데."

"액세서리 고르는 안목이 그렇게 없어? 이거 얼마 주고 샀어?"

나는 멍청하다. 중요한 건 선물에 담긴 마음이 아니라 선물에 담긴 돈이요, 선물을 감싼 브랜드다. 아내는 귀고리를 해본다.

"나는 금속 알레르기가 있어 가짜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알레르기 방지 특수 코팅이 되어 있어 괜찮대."

"벌써부터 가려운데."

아내는 투덜거리지만 나는 안다. 아마 아내는 선물받은 귀고리를 한 달은 하고 다닐 것이다. 그러다 누가 "어머 예쁘다. 이거 어디서 샀어요?" 하고 물어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할 게 틀림없다. "생일선물 받은 거야. 우리 남편이 감각은 좀 있지."

김상득 듀오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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