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9)|<제86화>경성야화(14)조용만|독립선언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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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학생들이 공원 대문을 나와 동대문·종로 쪽으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 행렬을 보고 박수를 보냈다. 거리가 온통 흥분의 도가니 속이었다.
나는 겁이 나서 동무들과 떨어져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어디에 갔었느냐」고 꾸중하셨다. 사촌형들이 와서 떠들어대는데 새벽에 누군가가 큰댁 대문 안에 독립선언서를 넣고 갔다.
할아버지는 그때 아들·조카·손자들을 불러서 가족회의를 열고 여러 가지를 의논하셨다고 한다.
3·1독립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천도교주 손병희이고, 우리 어머님의 외숙이 되는 위창 오세창 어른이 그 밑에서 권동진·최린 등과 함께 여러 가지 일을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독립선언서 맨 뒤에 33인의 이름이 있었는데 『여기 오세창이 있지 않느냐』며 사촌형이 독립선언서를 꺼내 보였다.
사촌형들이 간 뒤 어머니는 급히 위창댁으로 가셨다. 우리 집은 돈의동 52번지이고 그 댁은 45번지여서 우리 집 아랫골목에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세배도 갔고 위창 어른의 생신인 7월l5일에는 인사도 갔었다. 위창 어른은 아들·손자와 함께 사랑채와 안채가 있는 큰집에서 넉넉하게 지내셨다.
위창의 아버지 역매 오경석은 개화파의 선두로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맺게 한 막후 인물이었다.
또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의 사부로서 백의정승이란 별명을 가진 유대치와 절친한 친구사이였으며 북경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많은 개학서적을 사 가지고 와서 유대치에게 주기도 했다.
여기에서 잠시 파고다공원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파고다공원은 원래 원각사라는 큰절이 있던 곳인데 한 때 연산군이 기생 양성소로 만들었다가 폐지하고 그냥 빈터로 내버려두었었다.
고종시대에 이르러서 총세무사로 고용된 브라운(한국이름 백탁안)이라는 영국사람이 이 큰 절터를 그냥 내버려두기가 아까우니 근대식공원을 만들자고 하였다.
이 절터에는 아름다운 탑도 있고 큰 비석도 있어서 잘 꾸며 놓으면 좋은 공원이 될 듯 싶었다.
그래서 공원 이름을 영국식으로 「파고다(PAGODA)공원」이라고 이름짓고 그 절터 중앙에는 팔각정을 새로 지었다.
「파고다」란 말은 영어로 다중탑이란 뜻이다.
원래 이 절 터는 고려시대에 흥복사가 있던 곳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세조 때에 효령대군이 양주 회암사에서 원각법회라는 큰 불교행사를 열었는데 그때 길몽을 꾸었다고 하여 한양에 있는 옛날 고려시대의 흥복사 터에다 원각사라는 큰절을 짓기로 하였다.
절을 짓고 큰 종과 큰 탑, 큰비를 세워 장엄한 사찰을 만들었는데 그때 만든 탑과 비는 지금까지 남아있고 종은 없어졌다.
탑은 하얀 대리석으로 13층을 올렸는데 층마다 l2회상을 새겨 탑 전체가 보살천인의 군상이 되게 하였다.
탑의 균형이 아름답고 조각과 의장이 뛰어나 조선조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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