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팬암사가 주는 교훈/박준형 뉴욕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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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보에 대한 특혜시비로 한국의 정·재계가 시끄러운 사이 미국에서는 국적기로까지 여겨졌던 국제민간항공 팬암의 몰락이 전해지고 있다.
64년전 미­쿠바간 우편송달을 시작으로 민간항공사상 국제항공시대의 문을 열며 유럽·태평양 장거리국제노선을 개척해온 팬암이 극심한 경쟁을 이기지 못해 아시아·유럽·남미·아프리카 노선을 델타항공에 넘기고 9월쯤 문을 닫게 된다.
팬암의 흥망사를 보면 이것이 오늘의 미국을 있게한 자본주의 정신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된다.
이같은 생각은 팬암의 흥성기 보다는 몰락기의 처절한 자구노력을 보면 더욱 절실하다.
세계각국의 국적기 등장으로 극심한 경쟁에 직면한 팬암은 노조의 임금양보에도 불구하고 적자가 계속되자 78년 뉴욕맨해턴 한복판 파크애비뉴위에 높게 솟아있는 팬암빌딩을 처분한데 이어 80년엔 그랜드 센트럴 역위의 본부빌딩,81년엔 인터콘티넨탈 호텔체인,85년엔 이 항공사의 전통인 태평양노선을 매각했다.
이같은 자구노력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적자를 견디지못할 것으로 판단한 경영진은 남아있는 국제노선과 셔틀을 처분,조용히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회사측이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거나 연방정부나 주정부가 수많은 실직자와 대외적 체면,혹은 재기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위해 무슨 대책회의를 열었다는 등의 얘기는 없다.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정부특혜나 과다한 은행대출에 의존하지 않고 호황기에 축적한 자산을 처분하면서 대처해왔기 때문에 그 몰락의 배경에 이견이 분분치도 않았고 금융계에 대한 충격을 주거나 정치인들에게 논쟁거리도 되지않고 있다.
팬암은 공정한 게임이란 룰에 의해 일어섰다가 그 규칙에 따라 조용이 퇴장하고 있을 뿐이라는게 미국인들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정·관·언론계등 우리사회의 양심에 독을 뿌린 한 기업에 대한 특혜시비에서 보듯 특혜로 성장한 기업들이 조금만 어려워도 자구노력보다는 정부에 의존하려 하고,정부도 기업의 흥망을 공정한 게임에 맡기기 보다는 정치적 판단으로 좌우하려 하는 발상 등은 아직도 한국자본주의가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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