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막힌 대치 「4인중재」로 숨통/「백병원 긴장」풀리기 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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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중부서장 “정말 고맙습니다”연발/밤 11시까지 설득에 유족도 수락
○…7일 김양 부검을 앞둔 백병원 주변은 서서히 평온을 되찾기 시작.
병원양측 진입로에 설치된 바리케이드 주변을 지키고 있던 선봉대 학생들 1백여명도 거의 철수,5∼6명의 학생들만이 서있었지만 전날까지 감돌던 긴장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
○“서둘지는 않겠다”
○…김양 부검을 위해 이틀째 철야대기해온 서울지검 형사 3부는 7일 오전 8시40분쯤 서울대 이정빈 교수,고대 황적준 교수등 부검의 3명이 서초동 검찰청사에 도착하자 9시쯤 임채진 검사등 검사 2명과 함께 백병원으로 출발.
검찰은 『약속시간인 오전 10시에 부검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으나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리하게 서두르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화염병·최루탄의 충돌을 막기 위한 「최후의 대화」는 6일 오후 숨가쁘게 진행된 끝에 6시간만에 결실을 맺었다.
6일 오후 5시쯤 장을병 성대총장·박형규 목사·유인호 중대교수·한승헌 변호사등 4명이 영안실에 도착,장기표 위원장과 논의한후 부검에 일단 응하고 장례일정을 연기할 것을 대책위측에 제의했으며 경찰과의 중재를 맡겠다고 짤막하게 발표.
○…오후 5시45분쯤 중부서에 도착한 장총장일행은 서장이 회의중이라는 말을 듣고 서장실옆의 경무과장실에서 잠시 대기.
당시 성희구 중부서장은 5시부터 경찰관계자·소방서장·구청장·보건소장·병원관계자 등과 함께 백병원내 공권력투입을 앞두고 마지막 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던 것.
회의도중 경무과장실로 온 서장은 공권력투입이 임박해서인지 다소 굳어진 표정이었으나 박목사가 방문목적을 설명하자 『정말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환한 표정으로 『아주 적절한 시기에 고마운 말씀을 갖고와 대단히 반갑다』는 뜻을 밝혔다.
5분쯤후 시경국장의 수락전화를 받은 장총장은 『당국이나 저희들이나 겪고있는 괴로움은 별 차이가 없다』며 고마움의 뜻을 표시.
○강군 유족들도 설득
○…중부서장과의 협의를 끝내고 오후 8시30분쯤 다시 백병원 영안실로 돌아온 장을병 성대총장등 중재에 나선 4명은 장기표 집행위원장등 대책위관계자들과 협의끝에 김양의 어머니인 김종분씨를 고 강경대군의 어머니 이정순씨,고 이한렬군의 어머니 배은심씨등 유가협소속 어머니들이 먼저 설득키로 결정.
그러나 김씨는 이들의 설득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문채 거부의사를 강하게 나타내 이어 장을병 총장등 4명의 중재자들이 다시 설득하자 『가족회의를 거쳐 결정하겠다』고 대답한뒤 곧 가족회의를 열고 부검에 응하기로 결정.
오후 11시20분쯤 장위원장은 임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같은 결과를 알리고 부검에 관한 일정과 방법을 협의,7일 오전 10시로 합의했다.
○…이같은 소식이 학생들에게 전해지자 일부 학생들은 강력히 반발,『이제까지 우리가 어떻게 귀정이의 시신을 지켜왔는데 이렇게 쉽게 내줄 수는 없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서총련지도부에서 대책위의 결정에 따르기로 최종결론을 내림으로써 학생들의 반발도 일단락.
○지도층의 역할 실감
○…현장에 뛰어들어 학생과 전경들손에 쥐어졌던 화염병과 최루탄을 내려놓게 만든 4명의 행동은 진정 사회지도층이 이 난국에서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몸소 보여준 실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의 중재는 장총장이 평소 민주화운동을 통해 알고 지냈던 박목사,같은 해직교수출신으로 「해직교수협의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유교수,70년대 『다리』지 등을 통해 인연을 맺어온 한변호사에게 6일 저녁부터 연락,뜻을 같이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홍병기·이수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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