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민중교육』필화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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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어머니 400만 원이래요/지난 토요일 우리 과 교수님과 제가/서른 일곱 그학교 교장선생님을 뵈었는데요/이사장 친동생인 그분과 저희 교수님과는/각별한 사이여서 특별히 생각해 주시는 거래요/어머니 부산 누님에게서 소식 왔는지요/400만 원만 있으면 선생님 자리는 쉽게/시내에서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천안 형님에게선 이발소 작은집으로/전화라도 한 통 있었는지요/누님이나 형님이나 눈에 선한 살림살이/전들 왜 모르겠어요/…/어머니 제 어릴 때부터의 꿈, 선생님을 위해/400만 원은 어떻게든 있어야겠어요.』
『민중교육』 1집에 실린 고규태씨의 시 「사백만원이래요」 일부다. 사립 중·고교에서 교사를 뽑을 때 기부금을 강요하던 비리를 꼬집은 시다. 「교단에 서 있으면서도 이 모순덩어리 교육현실에 용케도 눈감고 살아왔구나 하는 참담한 부끄러움」을 떨치고 일선교사문인 20명이 교육현실을 비판한 무크 『민중교육』을 펴낸 것은 85년5월20일. 교육전문지이면서도 이 책은 발행 두 달만에 3만부 가량 팔려나가는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교육현실비판이념잡지 『민중교육』 창간호에 기고한 현직교사 20명이 파면권고 사직 등으로 교직을 잃거나 경고를 받는다. 85년8월13일자 주요일간지들은 『민중교육』지에 기고한 교사 중 10명이 파면되고 7명이 권고사직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문공부의 납본필증까지 받아 출간돼 잘 팔리고있는 잡지의 필진에 대해 어떻게 이러한 조치를 내릴 수 있을까.
한 잡지에 참여한 교사필진전원이 파면 등의 조치를 당한 교육사 및 출판사상 그 전례가 없었던 「민중교육필화사건」은 무엇인가?
교육무크 『민중교육』 창간 움직임은 84년 말부터 시작됐다.
당시 서울에서 교편을 잡으며 「오월시」 동인으로 문학활동을 펴던 김진경·윤재철·고광헌씨 등과 대전에서 「삶의 문학」 동인이면서 교사이던 조재도·유도혁·강병철·전인순·전무용씨 등 젊은 교사문인들은 교육현실의 모순을 제거하고 교육의 민주화이론 도출을 위한 잡지를 창간하기로 하고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편집방향을 세우고 원고도 모으다 실천문학사에서 펴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어떤 목적에 따라 희생되어도 좋다고 보는 도구적 인간관을 깨뜨리고 교사와 학생들이 인간의 질적인 측면·주체적 측면을 회복하는데서부터 우리의 교육이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편집인 일동의 이름으로 책머리에서 밝히고 있는 『민중교육』창간호는 좌담 「분단상황과 교육의 비인간화」, 특집 「교육의 민주화」를 비롯해 교육현장에서 부닥친 구체적 문제해결을 위한 몇 편의 글과 함께 교사들의 시·소설과 학생들의 글 등을 실었다.
그러나 책이 출간된 한 달여 뒤 서울시 교위에서 『민중교육』의 내용과 집필자 및 좌담참석교사의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안기부에도 내용검토를 의뢰함으로써 『민중교육』 탄압은 시작된다. 시교위에서 집필교사들을 소환하고 학교 자체적으로도 조사하기 시작하다 7월22일 유상덕씨를 경찰에서 연행해감으로써 탄압은 본격화된다. 각지방 교위나 경찰서에 소환돼 조사를 받던 집필자들 모두를 파면 조치하겠다는 문교부 입장이 밝혀지자 이 사건은 일파만파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기존의 우리 교육제도를 「가진 자」의 착취구조를 지탱·유지시키기 위한 제도로 규정하는 등 그 시각이 마르크스의 교육철학에 입각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체제는 오로지 계급간의 대립·갈등체제로만 부각시킴으로써 개인의 존엄성과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근거로 한 자유민주주의이념을 전면 부정하는 용공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문교부의 『민중교육』 분석내용은 일반에 중·고교에까지 의식화교육이 스며들고 있다는 인상을 줘 당시 추진되고있던 학원안정법제정의 구실을 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8월12일 국립은 시도교위별로, 사립은 법인별로 관련교사들에 대한 징계위원회를 열어 유상덕·윤재철·이철국·이순권·심림섭·김진경·고광헌·홍선웅·조재도·송대헌씨 등 10명은 파면, 심성보·유도혁·강병철·황재학·전인순·전무용·민병순씨 등 7명은 사직, 박경현·김종만씨 등 2명은 감봉, 임은경씨는 경고 등 총20명의 교사에 대해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국가보안법까지 동원 돼 김진경·윤재철씨와 당시 실천문학사 주간 송기원씨는 각8개월에서 1년까지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 발행사인 실천문학사는 수색을 당해 『민중교육』지 및 그와 관련된 원고를 압수당하다 8월23일 주력계간지『실천문학』 등록마저도 취소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한편 이 사건이 일어나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주언론운동협의회 등은 『출판·표현·비판의 자유에 대한탄압을 중지하라』며 성명서를 잇따라 발표하며 항의하는가 하면 스승을 잃은 학생들까지도 복직서명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당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교사와 학생에게 반이념교육을 감화해가며 이른바 「의식화교사」탄압을 가중시켜갔다.
이에 맞서 이 사건으로 해직된 교사들을 주축으로 진보적 교사들은 86년5월15일 「민주교육실천협의회」를 결성, 지난 26일 창립2주년을 맞은 전교조의 산파역이 되게 했다. 결국 80년대 문화운동의 전위를 맡은 문인들, 그 중에서 교사들의 교육현실과 제도를 비판한 글이 호응을 얻자 이를 좌경으로 몰아 무차별 탄압한 것이 교육문제를 오히려 사회 전면에 부각시켜 전교조 결성이라는 결과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경철 기자>

<고침>23일자 이 시리즈에 나간 한수산 사건 기사 중 작가 한수산씨가 보안사에 연행된 날짜는 5월29일이 아니라 28일이므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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