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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의 희생 이젠 그만/유승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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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자탁구 남북단일팀의 세계 제패는 정말 가슴이 울컥해지는 감동을 주었다. 최후의 승리가 결정되고 남북의 선수와 임원,응원단이 하나가 되어 얼싸안는 장면을 지켜보는 순간 현해탄 건너 이쪽에서도 통일이 된 것과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남북의 코치와 선수가 나란히 시상대에 서고 한반도를 그린 단기가 아리랑 연주속에 게양대 위로 오르고…. 오직 아리랑가락이 짧은 것이 한이었다.
우리들은 젊은이들에게 너무도 많은 빚을 지며 살아가고 있다. 고비마다 나라와 겨레에 감격과 영광을 안겨주는 쪽도 젊은이들이고 이 정치적 박토에서 그래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키워가는 것도 결국은 젊은이들이다.
50년도 채 못되는 지난 헌정사의 길목 길목에는 어김없이 젊은이들이 흘린 땀과 피가 흥건히 괴어 있다. 젊은이들이 그렇게 피를 흘릴때마다 기성세대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빈사의 고비마다 젊은이들이 흘린 피를 머금고 겨우 소생하는 민주주의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기에만 급급하지는 않았는가.
『나의 어린 날의 추억,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나는 자연을 만끽했고 고풍의 문화재에 심취했다. 친구들과 찍은 몇장의 사진이 슬라이드로 흐르고,사회의 외곽지대에서,무풍지대에서 스스로 망각한채 살아왔던 지난날이 부끄럽다… 내가 제물이 되어 인간들이 소외당하지 않은채 살아가게 하고 싶다… 사람냄새가 싫어지는 오늘,최루가스로 얼룩진듯한 저 하늘위에라도 오르고 싶다.』
4년전 이한열군은 우리들에게 이런 일기를 남기고 숨져갔다. 자연을 만끽하고 문화재에 심취하며 친구들과 즐겁게 사진을 찍는,소년기의 그 당연하고도 당연한 누림마저도 죄스럽고 부끄럽게 느끼도록 하는 현실밖에 제공하지 못했던 회한에 우리들의 가슴은 쓰리고 쓰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은 또 한편의 같은 일기와 만나고 있다.
『나의 걱정은 우리나라의 장래와 현실의 어려운 상황들이다. 정치를 못해도 너무 못한다. 전경들이 늘고 전경들의 무기도 개량되고 민생치안은 엉망이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대학입학후에도 여전히 부모를 「엄마·아빠」로 부르는 앳된 젊음이 최루탄 파편에 얼굴을 열한바늘이나 꿰매는 상처를 입는바 있으면서도 겁없이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야 했다면 그것은 결코 그의 잘못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책임을 관련 전경들에게 돌려서도 안될 것이다. 그들이 직접적인 가해자인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들 역시 이 불행한 시대의 희생자들일 뿐이다.
누가 똑같은 젊은이들을 이렇게 편을 갈라 죽이고 죽게 만드는가. 도대체 누가 시위진압에 앞장 서지 않으면 사진까지 찍었다가 온몸이 멍이 들도록 때려 철저한 폭력의 도구로 만드는가.
강경대군의 부친은 아들의 주검을 앞에 놓고 진작 이 사회의 민주화에 더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을 한스러워했다. 그 한은 비단 강군 아버지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이른바 「공안」의 검은 그림자가 다시금 이곳저곳에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부터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거부했더라면 오늘과 같은 사태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개인적 안일에 젖어 오로지 시간의 흐름에만 이 사회의 민주화를 맡기려했던 우리들은 모두가 강군에 대한 가해자이며 그런만큼 강군의 주검은 우리들 모두의 가슴에 묻어야 한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 쪽은 권력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한열군이 죽은 때로부터 4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까지도 똑같은 죽음이,아니 그보다 훨씬 참혹한 죽음을 목격해야 한다면 6·29의 성과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온갖 기득권을 동원해 선거에 임하고도 국민의 지지도는 고작 30% 남짓했다. 그런 좁은 지지기반위에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면 당연히 겸손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나마 최근 1년간에는 그것마저 뚝 떨어져 20%남짓한 지지도밖에 유지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오만스레 힘을 행사할 수가 있는가.
「공격적 진압」이라니­. 아니 누가 섬멸해야할 대상이란 말인가.
이상연 신임내무부장관은 신임회견에서 이번 사태로 인한 경찰의 사기저하를 잊지 않고 걱정했다. 좋다. 민생치안을 위해서라면 경찰의 사기저하를 바라는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장관이 과연 경찰이 사기를 진정으로 진작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 무엇인지를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경찰의 중립화일 것이다. 그것은 이번 가해 전경들 가족들의 푸념에서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경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민생치안에 그 온 힘을 돌린다면 누가 경찰에 손가락질을 할 것인가.
그런데도 정부·여당은 그저 윗자리의 숫자만 늘려놓는 경찰법개정안을 마련해놓고 그를 강행통과 시키려고 하지 않는가. 한낮에도 두꺼운 방석복을 입고 귀하디 귀한 청춘의 세월을 시민의 싸늘한 눈초리속에 지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라. 경찰법이 통과되면 과연 그들의 사기가 올라갈 것인가를­.
권력자체가 나쁜것이 아니라 권력의 오만이 나쁜 것이다. 앞으로는 부디 권력이 겸손해져 더 이상의 피를 흘리게 되지 않기를 바라고 싶다.
젊은이의 죽음은 이제 이걸로 충분하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소중한 것이라고 해도 앞으로 더 많은 젊은 피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겠는가. 매일 아침 등교하는 아이의 등뒤에서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 대신 그저 무사히 귀가하기를 기도해야하는 부모가 되기는 더 이상 싫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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