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의거」상이자회 최경렬 사무총장(요즘 뭘하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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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4·19」는 끝나지 않았습니다”/「그때의 정신」계승사업 펼치며 바쁜 나날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속에 그들의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오.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피어나리라」.
서울의 북한산기슭 수유동에 우뚝 솟은 「4월혁명기념탑」까만돌위에 새겨진 글귀는 31년전 자유·민주·정의를 위해 목숨을 던진 젊은이들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4·19당시 30세의 젊음으로 「이승만 하야」를 외치며 경무대로 진격하는 데모대를 이끌다 광화문앞에서 오른쪽 다리 관통상을 입고 쓰러져야 했던 최경렬씨(63,4·19의거상이자회 사무총장).
그는 한 세대를 갓 넘긴 4·19의 아침을 맞아 『4·19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또한번 강조했다.
­이제 혁명이 있은지도 31년이 지났으니 한 세대가 흐른 셈입니다. 그동안 4·19관련사업에만 일생을 바친 걸로 알고 있는데 남다른 감회가 있을 법도 합니다.
『4·19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민주·자유·정의를 외치며 기꺼이 목숨을 바친 젊음을 단 일푼이라도 생각한다면 이 나라의 부정부패는 있을 수 없지요. 수서비리가 뭐고,권력형 부정이 뭡니까. 우리의 젊은이들이 오늘같은 나라꼴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았어요. 정부는 좀더 강하게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민주를 위해 국민앞에 모범을 보여야할 때입니다.』
­혁명당시 선두대열에서 분연히 싸웠던 사람들 가운데 여럿이 정계에 투신,상당한 지위에 있는데요.
『모두 변절해서 우리 사회가 이 꼴입니다. 4·19는 누가 선동하고 누가 꾀어서 일어난게 아닙니다. 독재와 부정에 맞서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순수한 의기로 일어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지 정치 좀 한다고 부정한 짓이나 저지르고 있으니….』
­요즘 젊은 세대들의 4·19관을 어떻게 보십니까.
『무엇보다 4·19를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만 국한시키려는 시각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즉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한 역사적 사실로만 기억할뿐 우리 민족의 민주·자유를 향한 지속적인 투쟁의 맥락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물론 그 책임은 정부당국에도 있습니다. 우선 역사책에서 4·19를 하나의 사건으로 축소·단순화시키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 세대가 지나도록 기념관 하나 건립하지 않은 정부 아닙니까.』
­4·19에 참여하신 당시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연세대를 졸업하고 조그마한 개인회사에 취직,일하다 3·15를 보고 회사를 그만 두었지요.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열렬했던 나로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학창시절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분연히 일어서야 한다는 취지를 얘기하고 동의를 얻어냈어요. 경무대로 진격할때도 가장 앞에 서서 「이승만 하야」를 외쳤는데 총소리에 그만 정신을 잃었습니다.
한참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었고 다리는 피범벅과 함께 통증이 심했어요. 그뒤 병원·집을 전전하며 1년여동안 치료를 받았는데도 성한 다리는 끝내 되찾지 못했어요.』
­5·16이후에 여러차례 옥고를 치르셨지요.
『혁명이 끝나자 너도 나도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의 역할과 권리만을 강조하더군요. 내가 관계했던 「4월혁명불구학생동지회」를 포함,20여개 정도의 단체들이 난립하다보니 한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정부는 정부대로 사후보상문제에 별관심이 없었어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한달여동안 각 단체장들을 찾아다니며 「한목소리」를 내야 혁명이 산다는 논리로 설득했죠.
그 결과 63년 1월 「전국 4월혁명 청년조직위」를 결성,초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5·16군사쿠데타의 부당성,한일의정서비준 반대,김종필 외유공항저지사건등 나름대로 민주·정의를 위한 투쟁을 하다보니 10여차례나 감옥생활을 하게됐지. 그래서 지금까지 4·19관련 활동만 하고 있지요.』
­그동안 4·19는 「거사」에서 「의거」로,최근에 다시 「혁명」으로 시대에 따라 그 성격 규정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또 당시 「좌절된 혁명」이란 평가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4·19의 올바른 계승·발전에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으로 보십니까.
『무엇보다 역사적 평가작업이 좀더 구체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과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불과 10여년전에 일어난 광주항쟁이나 10·26보다 깊이있는 연구와 논의가 없었던게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민 모두 말로만 4·19 하지 말고 그 진정한 뜻을 알기 위해 1년에 단하루라도 4·19 묘지를 찾는 성의를 가졌으면 합니다.』
­앞으로 활동계획은.
『죽을 때까지 후세들에게 4·19정신을 함양하는 일을 할겁니다. 4·19를 국경일로 하는 문제나 묘역 성지화작업·기념관 건립 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64,65,68년등 세차례에 걸쳐 상이자회장직을 맡아온 최씨는 요즘은 사무총장직을 맡아 당시 독재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청년학도의 유가족과 상이자들의 뒷바라지에 생을 바치고 있다. 비가 올때면 오른쪽다리가 쑤셔오지만 1주일에 한두번씩 집부근 볼링장에 들러 건강을 유지한다.
큰딸(30)을 출가시키고 서울 논현동 양옥에서 부인 주영란 여사(56)와 단둘이 살고 있는 최씨는 1주일에 한두번씩 묘역확장 공사가 한창인 수유동 4·19묘역을 찾아 그날의 뜻을 되씹어 본다.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1주일에 한번씩 찾아오는 아들(29)과 4·19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는 것도 최씨는 「삶의 활력소」라고 했다.<최형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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