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가 우리체제에 보낸 경종(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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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위기증후군… 배신감 위험수위
낙타의 허리를 부러뜨린 한개의 지푸라기­. 수서사건을 보면서 보통사람들이 이 사회구조와 지도층을 향해 터뜨리고 있는 분노와 배신감은 이 격언을 연상케한다.
아무리 튼튼한 낙타의 허리라도 짐을 계속 싣다보면 견딜수 있는 한계점이 있을 것이다. 그 한계점에 다다랐을때 단 한오라기의 지푸라기만 더 올려놔도 허리는 부러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보통사람들의 분노는 바로 그러한 수준에 와 있는 것이다.
지난 5,6개월동안 드러난 각종 범죄,부정·비리·의혹사건들은 물론 6공들어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관행」이란 이름으로 횡행되기 시작한 것은 유신이후,절대권력이 필연적으로 낳은 악의 유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유산이 개혁과 새출발을 호언하고 나선 6공 아래서도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과도기의 방만한 분위기를 틈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현실은 국민들이 느끼는 배신감의 비등점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그리고 사직당국은 최근 잇따라 일어나고 있는 상층부의 부패상을 척결함에 있어서 그런 위기의식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범죄와 범죄감시기관의 유착증상,국회의원의 뇌물외유,대학입시에 얽힌 범법사례,그리고 검은 구름처럼 사회를 암울하게 휘덮고 있는 수서사건은 우리 사회,특히 권력과 금력을 휘두르는 특권계층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병리현상의 증후군이다.
물론 사직당국은 이들 사건들에 대해 법의 엄정한 척도에 따라 성역없는 수사와 처벌을 단행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건을 사회병리의 증후군으로 인식한다면 정치권과 행정부도 그들대로 철저한 위기의식으로 정권이나 정파안보의 차원을 넘어 우리 체제의 안보라는 차원에서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한 국가,한 사회가 난관에 부닥쳐도 절망하지 않고 생동력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체제에 대한 국민의 기본적 믿음이 있어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든 열심히 일하면 그에 맞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모든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믿음을 지탱해온 으뜸가는 사안은 교육과 내집 마련의 기회균등이다. 이 두 사안은 사회적 상승 이동의 거의 유일한 관문이며 가난 속에서도 참고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원동력을 제공해왔다. 그것은 한국을 오늘 세계 교역국 제12위에 올려놓은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적어도 이 두가지 여건이 그런대로 공정하게 유지된다면 다른 분야에 대한 불만이 있다해도 인내심의 한계점은 어느정도 여유를 갖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입시범죄와 수서사건은 바로 이 기본적 믿음에 배신감과 허탈감을 안겨줬다.
아무리 노력해도 돈있고 권력있는 사람들이 법을 자기들에 유리하게 해석해 새치기한다는 의혹이 벗겨지지 않는다면,그래서 상승 이동의 관문은 처음부터 미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신이 확산되어 있다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활력은 물론 체제 자체에 대한 믿음도 지탱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사태가 어떻게 결말지어지느냐는 문제는 우리 국가·체제의 안위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행정절차상에는 문제가 없다」든가,「법해석상의 착오」라거나 몇몇 관리들을 속죄양으로 내밀고 마는 식으로 끝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의 문제보다 법 이전의 문제,즉 국가기관의 기강문제,지도층의 집단적 도덕성의 문제,분배문제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정의의 문제,정부와 국민,정치와 국민사이의 기본적 믿음의 문제가 더 심각한 과제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 과제는 사실 6공이 들어서면서 스스로 국민들에게 약속한 개혁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집권 3년을 넘으면서 그런 의지나 능력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특히 민자당 출범 이후에는 개혁의 의도조차 의심받게 된 가운데 퇴임이후의 안보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의혹이 불신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여야가 다같이 의혹의 대상이 된 사건이니 지자제 선거시기를 미루기로 했다든가,우리측에만 타격이 가해질 듯하니 저쪽도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같이 오물을 덮어쓰자는 식의 정치공학적 접근만으로는 신뢰회복의 계기가 될 수 없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6공 지도층은 하나하나의 비리를 별개로 보지 말고 총체적 위기징후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느끼고 있는 박탈감은 이번 일련의 사건에서 드러나고 있는 상층부의 만연한 부정·비리에 대한 배신감으로 더욱 증폭되고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는데서 문제해결의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달라진 세상에서 지난날과 같은 행태와 방법으로 계속 지도층의 위치를 유지하려는 시대착오적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런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해서 「총체적 위기」「범죄와의 전쟁」이 근본적으로 극복될 수 있는 방향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여고 야고,집권자고 후계자고,기득권에 집착하는 「있는 자」할 것 없이 다같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밀리게 되리란 것을 알아야 한다.
수서사건에서 그런 충격을 받고,거기에서 개혁의지의 재충전을 기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위기는 점점 한계점을 향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지 않을 수 없음을 관계당국과 정치권은 때늦기 전에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회 상층부는 전체 국민들에게 의식개혁을 호소할 수 있는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또 혁명 아닌 개혁을 통해서도 수십년동안 쌓여온 악의 유산을 척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새로운 각오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국민들의 인내심은 이제 더이상 사회비리를 참고 견딜 인내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경고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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